[데일리차이나= 이경민 기자]
중국 관영매체 신화통신에 따르면 장쩌민 전 주석은 상하이에서 백혈병, 다발성 장기부전 등으로 치료를 받던 중 30일 오후 12시 13분(현지시각) 사망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위원장으로 구성된 장례위원회는 장쩌민 전 주석의 유언과 전례 등을 따라 장례 절차를 진행한다. 또한 장례위는 추모대회 거행 전 베이징 톈안먼·신화먼·인민대회당 및 각 외교 공관에 조기를 게양할 것이며 중국의 관례에 따라 외국 정부와 정당 대표, 우호 인사를 국장에 초청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장쩌민 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군, 각 민족 인민에게 있어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라며 "당 중앙은 모든 사람에게 슬픔을 힘으로 바꾸고 동지의 유지를 계승하며 실제 행동으로 애도를 표하기를 호소한다"고 밝혔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은 중국공산당 3세대 지도부의 핵심 지도자로서, 1985년 상하이 시장, 1987년 상하이시 당 서기장을 맡은 이후 1989년 톈안먼 항쟁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톈안먼 항쟁 당시 상하이 당 서기였던 장 전 주석은 상하이 대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한 뒤 톈안먼 시위를 유혈 진압하려는 덩샤오핑을 옹호해 덩의 신뢰를 얻었으며, 곧 덩의 뒤를 이을 유력한 후계자로 지목됐다.
또한 장 전 주석은 미국 등 주요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노력했다. 1995년 그는 중국 주석으로서 최초로 한국에 방문하여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한중관계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1997년엔 미국에 국빈 방문하여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과 만나 정상회담을 갖는 등 자본주의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장 전 주석은 붕괴 직전이었던 중국을 경제 대국으로 변모 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당 총서기에 오른 1989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조7200억위안(약 318조8천억원)이었지만 퇴진하던 2003년은 12조1700억위안(약 2240조)을 기록했다. 그는 공산당 역시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전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른바 ‘3개 대표론’을 제창하며 경제 성장, 문화 진보, 민생의 발전과 이익을 도모했다. 자본가 계급을 포용하고 그들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하는 등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대 중국’의 문을 바로 장 전 주석이 연 것이다.
그러나 명의 존재하면 암이 존재하듯, 장 전 주석의 과오 역시 존재한다. 1999년 7월 20일 장쩌민은 리펑과 주룽지를 포함한 상무위원 6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티베트와 기공 수련 단체인 파룬궁을 ‘사교(邪敎)'로 지정했다. 그는 파룬궁 수련자가 8000만 공산당원의 수를 위협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지자 사상 개조라는 허울 좋은 핑계 아래 파룬궁 수련자 수십만 명을 불법 투옥 시켰다. 그의 재임 시기 시작된 파룬궁 박해와 탄압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장 전 주석은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는 1992년 덩샤오핑이 실질적으로 은퇴하며 실권을 장악한 후론 상하이 출신, 본인의 측근 정치인들로 요직을 채워 이른바 ‘상하이방’을 만들었다. 상하이방 세력은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그 중심에 있던 장쩌민은 2002년 후진타오에게 당 총서기직을 이양한 뒤에도 2004년까지 당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유지했다. 완전한 퇴임 이후에도 당 인사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상하이방의 구심점이자 좌장인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상하이방의 몰락과 함께 사망했다. 중국공산당 파벌은 태자당 내의 ‘시자쥔’을 제외한 채 모두 와해되었으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권리 변호사, 상업 뉴스 매체, 투쟁적 반체제 인사 등의 ‘작은’ 자유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사망하며 시 주석의 1인 천하 시대는 더욱 공고해질 전망이다. <저작권자 ⓒ 디에이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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