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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하나'는 무엇인가?

KCAU | 기사입력 2022/10/06 [15:31]

진정한 '하나'는 무엇인가?

KCAU | 입력 : 2022/10/06 [15:31]

[데일리차이나= KCAU 장유정, 박희상, 이경민, 신성은, 김예림, 박선영, 장윤수]

 

 

▲ 중국 유명 연예인 디리러바 <사진= 百度>  © 데일리차이나

 

인기를 구가 중인 소수민족연예인

중국을 대표하는 인기 배우 ‘유역비(亦菲)’, ‘디리러바(迪丽热)’, ‘류시시(刘诗诗)’.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소수민족 출신 배우라는 점이다.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그들은 중국을 비롯한 전세계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소수민족’이라는 신분으로 중국 본토 내 활동에 이득을 취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위구르족 출신인 디리러바는 시진핑 정부의 소수민족 띄워 주기 정책의 수혜자 중 한 명으로, 현재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배우이다. 국내에서도 그녀의 작품과 팬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디리러바는 대표적인 ‘친정부’ 연예인으로서, ‘신장 목화 사건’을 옹호하여 논란이 되었다. 신장에서 강제 노역으로 재배하는 목화, 이 목화로 생산되는 제품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친 아디다스에 전속모델 계약 해지를 선언한 것이다.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위구르족 출신 탑스타가 중국 공산당과 같은 입장을 표했다는 사실은 중국을 제외한 해외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그녀는 이 사건 이전에도 중국 공산당의 홍보운동인 “전국민이 헌법을 읽고 헌법 정신을 응집시키자"는 시진핑의 헌법 낭독에 참여하였으며, 공산당을 옹호하는 위구르어 드라마를 찍는 등 중국 내에서도 공산당의 기조를 지지하는 연예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반중 위구르인들과 전세계 많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중국 인구의 약 8%를 차지하는 소수민족에게 영향력이 큰 소수민족 탑스타의 발언은 그들 자신에게도, 전세계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민족국가, 중국

중국은 한족을 중심으로 인구의 8%를 차지하는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민족국가이다. 소수민족 중 인구가 가장 많은 광시 자치구의 좡()족부터(약 1700만 명) 가장 적은 타타얼(塔塔尔)족까지(약 3500), 55개 소수민족들은 각자 서로 다른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화와 풍습을 자랑한다. 이들 중 국제적으로 이슈가 되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민족으로는 대표적으로 위구르족(吾尔), 조선족(朝鲜), 티베트족(藏族)이 있다. 

 

▲ 위구르족 사진 <출처=百度 제공>  © 데일리차이나

 

중국 서북 지역의 신장 위구르자치구에 거주하는 위구르족은 2021년 기준 약 1006만 명으로 중국 내 소수민족 가운데 인구규모가 다섯 번째로 큰 민족이다. ‘위구르는 위구르 언어의 ‘uyghur’를 표현한 것으로 연합, 단결, 동맹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위구르어와 고유문자인 위구르 문자를 사용하지만 도시 지역에서는 중국어를 병용하기도 하며 종교는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다.

위구르족이 거주하던 신장지역은 1727년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카흐타 조약에 의해 분할되었고,  지역의 위구르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흡수되었. 그러나 위구르족은 이 지역에서 오랜 기간 동안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강하게 유지해 왔, 오늘날 중국에서 민족 분쟁이 가장 심한 지역중 하나가 되었다.

 

위구르인들은 1930년대부터 중국에서 독립하여 동투르키스탄(Eastern-Turkystan)공화국을 건설하려는 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왔다. 특히 1990년대이후 소련이 해체되고 카자흐스탄(Kazakhstan), 키르키즈스탄(Kyrghyz), 우즈베키스탄(Uzbekistan) 등 튀르크계 이슬람민족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위구르의 분리독립 움직임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이 거주하는 신장 위구르자치구는 중국의 중요 목축업 지역일 뿐만 아니라 풍부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어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의 독립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으로 분석된다. 

 

▲ 조선족 <사진= 百度>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구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19세기부터 한반도에서 이주한 한인들을 주축으로 형성되었다. 따라서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 문자와 각종 풍속 문화는 한국과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조선족은 19세기에 발생한 각종 전쟁으로 인한 정치, 경제적 어려움 및 20세기 초 일제의 압제 등으로 다수의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한반도에서 중국의 동북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형성됐다. 이후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한반도가 해방이 되면서 일부는 한반도로 다시 돌아갔지만 계속 중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대다수가 중국 국민이자 중국 내 소수민족이 되었다.  

 

▲ 티베트족 <사진= 百度>  © 데일리차이나

중국 서장자치구의 평균 해발 약 4000m의 티베트 고원에서 생활하는 티베트족은 매우 유구한 역사와 아름다운 종교 문화를 자랑한다. 티베트족 또한 위구르족과 함께 중국에서 민족 분쟁이 가장 심한 민족중 하나, 중국 소수민족 중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티베트 지역은 원나라, 청나라때 중국으로 편입되어 같은 나라로 묶이게 되었으나 청나라의 멸망 후 독립을 선언하여 실질적인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1950,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를 침공했고 근대화가 잘 이뤄지지 못했던 티베트 군대는 중국군을 상대로 손쉽게 패배했다. 19515, 몇 차례의 협상을 통해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임을 인정하지만 달라이 라마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선에서 타협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티베트족의 문화와 종교활동을 억압하고, 한족 이주정책, 티베트와 칭하이성을 잇는 칭짱철도(靑藏鐵路) 건설 등으로 티베트 고유의 독자성 퇴색시키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또한 중국 당국이 티베트 불교를 상징하는 불상과 사원을 지속적으로 철거해 온 것 역시 확인됐다. 중국 정부의 이러한 태도에 티베트 지역에서는 중국의 탄압에 항의하고 자치권을 획득하기 위한 분신자살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소수민족 정책, ‘하나의 중국

중국 소수민족 정책의 기초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통일 정책이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이후, 한족을 포함한 모든 민족은 하나이며 중국은 하나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모든 민족은 평등하며 어떠한 압박도 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수민족 정책은 다음과 같다.

  

1.민족구역자치제도

이는 각 소수민족이 각각의 지역에서 구역자치를 실시하고 자치기관을 설립하여 자치권을 행사하는 제도이다. 비교적 효과적으로 시행된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이 역시 정부 지도하의 획일화된 발전정책이 주된 내용이 되면서 논란을 빚고 있다. 

 

2. 언어, 문화 및 종교정책

중국은 소수민족이 자체 언어를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언어가 없는 민족을 대상으로 문자를 쓸 수 있도록 장려했으며 소수민족의 문자를 제1언어로 사용하도록 했다. 또한 각 소수민족의 문화 및 풍습을 인정하며 종교에 대한 자유도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민족에 대해서는 이에 반하는 정책을 채택하기도 했다.

 

3.교육관련 정책

소수민족을 중국 정부의 일원으로 양성하기 위한 정책으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후부터 여러 단계에 걸쳐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이는 크게 정치간부와 전문간부로 나뉘며 간부양성을 통해 중국 문화를 소수민족에 보급하여 중국 전반에 걸쳐 동질성을 함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4.소수민족 우대정책(소수민족지역 자치법, 人民共和民族域自治)

현재는 폐지수순을 밟고 있지만, 기존에 중국은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대학 입학 시 특혜를 제공했다. 소수민족에게는 대학 입학을 위해 치르는 시험 점수 외에 별도로 가산점을 부여하는 것이다. 더불어 대학 입학 정원에 소수민족 정원을 따로 산정하여 소수민족의 대학 입학 기회를 확대할 것을 규정하기도 했다.

 

또한 소수민족 지역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각종 경제적 혜택을 제공한다.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은 중국 본토의 주변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경제가 낙후되어 있다. 정부는 그들이 사는 지역의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대도시와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해당 지역에 각종 사업 유치를 하는 것은 물론 그 지역에 대한 세금 감면 조치도 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부 정책에 소수민족의 의견을 적극반영하기 위해 소수민족 출신 정치인을 일정 비율 중앙에 등용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소수민족의 현실

앞서 다룬 것과 같이 중국은 사회, 경제, 정치 등 여러 방면에서 소수민족 관련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소수민족 우대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데, 이러한 우대조치에도 불구하고 중국 내 소수민족들은 여전히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다. 

 

1.소수민족에 대한 부정적 인식 증가

중국 정부가 각종 소수민족 통합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실시한 우대정책은 역차별 논란을 야기했다. 중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족이 소수민족 우대 정책이 역으로 한족을 차별하는 것이라며 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이러한 역차별 문제로 인해 한족 내에서는 한족과 소수민족을 구분 짓고 소수민족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점차 강해지게 되었다. 

 

2.소수민족의 정체성 혼란 야기

역차별 논란은 소수민족 구성원 스스로가 느끼는 정체성 혼란의 문제를 심화했다. 소수민족은 정치적, 법적으로 중국의 인민에 속한다.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그들은 소수민족이라는 꼬리표를 항상 달고 있으며 그로 인해 혜택과 차별을 동시에 받는다. 소수민족들은 자신들의 법적 지위와 일상생활에서 사회적 지위의 이중성을 직접 겪으며 모호한 자신들의 지위에 혼란을 겪게 된다.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 집행과 국민들의 정부 정책에 대한 적절한 이해의 부족 사이에서 오는 괴리로 소수민족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3.소수민족의 주변화 경향 심화

경제적으로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 관련 정책의 일환으로 한족의 소수민족 거주 지역으로의 이동을 장려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주한 한족이 해당 지역의 경제 생활의 주요 기반을 독점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소수민족과 한족의 경제 격차가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 소수민족 지역에 대한 중국 정부의 경제 혜택을 소수민족이 아닌 한족이 받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자신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에서도 한족이 중심을 차지하고 경제적 이익을 독차지하자 원래 거주하던 소수민족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더욱 주변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결국 소수민족을 우대하려던 정책은 오히려 소수민족의 주변화 경향을 더욱 심화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중국 소수민족 인권침해 및 차별

1.위구르족 탄압 및 차별

위구르족은 이슬람교를 믿는 튀르크계 유목민족으로 한족과 언어와 문화, 종교 역사는 물론 외모적인 부분도 가장 다르다. 이들은 터키 문화와 가깝고 튀르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중국 정부의 시선은 부정적이다.

 

이로 인해 나타난 중국정부의 위구르족을 향한 인권탄압은 국제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중국이 위구르족의 인권을 탄압해 왔다는 보고서를 지난달 31일 공식 발표했다. 보고서에 의하면 위구르족을 수감시켜 가혹행위와 고문 뿐만 아니라 여성 수감자에게는 성적 학대도 자행됐다고 전했으나, 중국은 이에 대해 무효이고 허위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또한 위구르족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탄압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중국 기업 역시 이에 기여하는 사례 나타났다. 중국 통신장비 제조사 화웨(华为) 중국 소수민족인 위구르인을 식별, 감시하는 인공지능소프트웨어 실험에 참여하여 군중속에서 위구르인을 발견하면 경찰 등 당국에 자동으로 알림을 보내는 AI기반 카메라 시스템을 개발했다는 내용이 담긴 문건이 발각된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소수민족 동화정책이 잇달아 되면서 나타나는 탄압 및 강제교화는 수많은 국가의 비판을 면치못하고 있다.

 

2.무늬만 소수민족? 중국의 소수민족 언어 정책

중국의 언어 교육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우선시되는 언어는 한족의 중국어이다. 고입 대입 소수민족 가산점이 폐지수순을 밟으면서 20209월부터는 통합교과서가 전면 시행되었고 교재와 수업 모두 중국어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소수민족 학생에 대한 가산점은 공정 문제로 많은 항의가 있었지만 소수민족의 발전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2012년 말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대입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중국의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며 소수민족의 가산점 제도는 거의 소멸 직전이 되었다. 

 

또한 중국의 중앙집권화가 강해지면서 한국어 표기가 우선이었던 연변 조선족자치주에서는 지난 725일 문자표기 중국어를 우선으로 하는 조선 언어문자 공작 조례 실시 세칙이 시행되었다. 이에 따르면 국가기관·기업·사회단체·자영업자들 문자를 표기할 때 중국어한국어를 병기하되, 중국어가 앞에 나오도록 해야 한다. 이에 대해 조선족 정체성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 나오고 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소수민족 동화정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속에서 나타나는 한족중심의 정책과 강제적 소수민족 탄압 정책으로 소수민족 인권침해와 차별 사례들이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

 

세계의 다민족 국가는 어떨까?

인도네시아

우리는 중국보다 조금 더 긴 근대 민족갈등의 역사를 가진 인도네시아의 민족정책에서 중국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엿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총인구는 약 25600만 명으로 1,300개가 넘는 민족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자바인, 순다인, 마두루인, 중국계 화교 등 중국보다도 훨씬 많은 민족들이 살아가는 인도네시아는 어떤 방식으로 민족 간의 관계를 유지해왔을까?

 

우선 역사적으로 볼 때, 인도네시아의 민족갈등관리는 3단계를 걸쳐 변화했다. 

1.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 전후

인도네시아는 과거 3-400년간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받은 역사가 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자연스레 독립 이후의 민족간 관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정치인들은 민족 문제에 관한 경험 부족으로 독립 후 불거지는 민족 간 갈등 문제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할 역량이 부족했다. 이 시기부터 종족간 계층화가 진행되었으며 근현대에 들어와 종족의 계층화를 퇴치하는 노력을 기했으나 여전히 특정 민족(중국계)이 경제권을 장악하는 등 기울어진 모양새를 바로잡지 못한 부분이 존재한다.

 

2.대의민주주의와 교도 민주주의 시기

대의민주주의와 교도민주주의는 민족간 갈등에 대해 판이한 접근법을 가지고 있는데, 각각의 성과와 한계가 존재한다. 

 

대의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개방적인 정치체계를 추구한다. , 정당체계를 통해 종족 간의 목소리를 내고 선거를 통해 자유롭게 경쟁하고, 갈등을 의회 내에서 타협과 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시스템을 지향한다. 실제로 인도네시아어를 통한 공공교육체계를 수립하기도 했으며, 이는 종족에 구애받지 않는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국가통합의 문화와 공감대를 수립하는 데 기여하였으나, 이슬람과 국가, 중앙-지방관계에서의 종족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교도민주주의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여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긴다. 이 시기는 국가와 이슬람, 중앙과 지방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강제와 설득이 혼합되어 종족간, 중앙-지방간 갈등을 해소하려고 했으나 결국 196510월 군부지도자의 암살 이후 신 질서체제가 수립되며 교도민주주의 체제는 민족 통합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3.신 질서체제 구축기

신 질서체제는 수하르또라는 개인이 등장한 후 그의 개인적 권력에 의존했던 권위주의 체제로, 당시 지도자들은 강제, 설득, 교환, 호선 등을 조합하여 민족 간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 시기는 권위주의체제 특성상 국민들에 무력진압의 방식으로 국민들에 강제력을 행사하기도 했는데, 학생시위 참가자, 야당 정치인들, 일반 국민들도 무력 진압되거나 투옥되는 일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집단과 종족집단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제도와 관행을 정당화시키는 상징을 구성해서 유지시키기도 했는데, 이전부터 존재했으나 체제유지에 적합하게 재구성/재해석한 제도나 관행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상징물들은 여러 민족들이 품는 불만을 잠재우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중앙정부의 권력이 비교적 약화되고 정치적/종교적 자유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최근 점점 더 많은 종족들이 불합리에 대항하고 자유와 권리를 추구하는 모습을 조금씩 볼 수 있다.

 

미국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당시 북미 대륙에는 약 1500만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들 중의 상당수는 대도시를 이루고 살거나 높은 수준의 사회구조와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북부와 중부, 남부에 나뉘어 여러 부족들이 살고 있었으며, 특히 대륙 북부의 원주민들은 청교도 이주민들과 교류하며 일찍이 백인 문화를 접했고 다채로운 공동체 생활을 영위해왔다. 미국은 건국 이래로 토착 원주민에 대한 정책 이념을 다방면으로 선보였다. 북미 원주민에 대한 미국의 대응 사례를 시대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18세기

미국 건립 초기에는 원주민 부족을 독립된 나라로 간주했다. 때문에 이들은 미국 연방정부와 대등한 위치에서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미국 이주민의 수가 원주민의 수에 비해 상당한 열세에 놓여 있었으며, 국가 내외부적으로 많은 위협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원주민과의 갈등은 기피 대상이었다. 1778년에는 원주민들의 거주지를 보호하기 위해 백인 이주민들이 원주민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도록 하는 조약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백인의 원주민 토 침범 및 강탈 행위는 끊이지 않았다.

 

2. 19세기

19세기 초반 크릭족에 대한 군사적 탄압으로 원주민이 열세에 놓이게 되면서 기존 백인 이주민들과 처지가 뒤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정부가 주권주의를 표방하며 들어서면서 원주민 부족의 독립국가 건설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1830인디언 추방 법안이 통과되면서 원주민 부족은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백인사회와 분리되었다. 하지만 서부 개척지를 찾아 이동하는 백인 이주민이 유입되고 이민자의 수가 늘어나면서 원주민 공동체에 대 논의는 계속되었다. 결국은 백인 문화로의 동화주의적 목소리가 커졌다. 원주민 공동체가 백인 주류사회로 녹아들지 않는 한 사회 통합은 어렵다는 것이 당시의 목소리였다. 1887년에는 도스법이라고도 불리는 토지 할당법이 통과되면서 원주민 공동체의 와해를 목적으로 기존 원주민의 전통적 토지소유 개념과 완전히 반대되는 토지제도를 시행했다.

 

3. 20세기

20세기 초반에는 국가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원주민 공동체에 대한 정책은 사뭇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미국 정부는 공동체 뉴딜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도스법을 폐지하고 원주민 공동체의 재건을 목표로 많은 정치적 자유와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을 겪고, 특히 일본이 진주만을 침공하면서 미국 내부에서는 소수 집단인 일본 이민자 공동체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음 정부는 이러한 목소리에 힘입어 집단보다는 개인 해방을 추구하는 페어딜정책을 내세운다. 여기서 원주민 공동체는 다시 난관에 봉착한다. 이어 미국 정부가 원주민 부족이 도시 지역으로 이주하여 동화될 것을 우선시하는 종결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원주민의 경제와 사회, 교육 여건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들의 자율성은 보장받지 못했다. 이에 많은 원주민이 토착 공동체와의 연을 끊고 백인 사회 도시로 유입됐다.

 

20세기 중반에는 백인 전용 좌석에 앉았던 흑인 로자 파크스가 체포되면서부터 흑인인권운동이 확산된다. 이러한 흑인들의 목소리는 원주민대중운동의 확산에도 기여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주민대중운동의 주된 전력은 원주민 공동체를 떠나 백인사회로 이주한 젊은 원주민들이었다. 종결정책으로 인해 원주민 공동체에서 벗어나 백인사회에서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대중으로써 목소리를 내는 법을 목격한 이들이 다시 원주민 공동체로 돌아가 대중운동을 이끌어 나가게 된다. 이는 1975년 자결권에 관련한 법과 교육권조법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른다. 이후 미국 정부는 원주민종족의 사회경제적 지원을 확대해왔다. 2004년에는 과거 원주민에게 저질렀던 잘못에 대한 사과를 했고, 2009년에는 역사적 사죄의 내용을 담은 법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른다.

 

하나의 중국이룰 수 있을까?

소수민족의 ‘정체성과 전통을 유지하고자 중국 정부는 다양한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마련했. 하지만 이는 그저 ‘정부 통제 하에 만들어진 하나의 제도일 뿐이다. 또한 한족 이주 정책을 통해 민족의 융합을 이룩하고자 하지만 이 역시 한족 유입을 통해 소수민족을 통제함으로써 하나의 중국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집권 이후, 국 내 민족주의 더욱 강화되면서 소수민족에 대해 한족의 언어, 문화를 배우도록 강제하고 있다. 하지만 강제적인 언어 및 문화 수용정책이 강화될수록 소수민족 한족에 대한 반감 또한 더욱 강화될 뿐이다. 특히 한족 이주 정책 이후, 개발 정책의 불균형으로 대부분의 경제적 혜택을 한족이 가져가게 되면서 중국내 민족 불균형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과연 중국이 말하는 하나의 중국은 무엇일까? 한족을 포함한 56개의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국가를 말하는 것일까, 혹은 55개의 소수민족을 한족화 하려는 91.6%의 한족의 전략일까? 결국 주류는 한족이고 나머지는 소수민족이기 때문에, 소수의 입장이 완전하게 반영되기는 결코 쉽지 않다. 현재와 같 국의 민족주의 태도가 심화된다면 소수민족 분쟁 및 갈등은 앞으로도 필연적일 것이다.

 

서로 다른 공동체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이 정치적으로 효과적이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각 문화의 차이를 최대한 활용한다면 최고의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움을 받아들이며 다양성과 유연성을 바탕으로 한 통합을 비로소 성숙한 통합이라고 할 수 있다. 샐러드볼 속의 재료처럼 각 문화가 교유의 색과 맛을 잃지 않는 조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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