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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통제 사이의 홍콩

KCAU | 기사입력 2022/08/22 [08:14]

자유와 통제 사이의 홍콩

KCAU | 입력 : 2022/08/22 [08:14]

[데일리차이나= KCAU 유효정, 박희상, 김예림, 노가희, 장유정, 장윤수, 이경민]

 

▲ 1792년 영국의 사신인 메카트니가 청나라에 방문한 것을 기록한 그림 <사진= 위키피디아>  


1792 영국의 사신인 메카트니가 청나라에 방문했다. 이에 건륭제는 속국의 예의를 다해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절을 하고 아홉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  것을 명했다. 하지만 “신에게 말고는 왕에게도 무릎 하나를 꿇는  전부라는 서양의 예법에 따라 메카트니는 삼궤구고두례를 거절하며 무릎 하나를 꿇는 것에 그쳤다. 물론 청나라  기록에는 “영국 사절단이  무릎을 꿇었다라고 기록되었지만 말이다.

 

이처럼 외교나 국제행사에서 인사는 기본 예법이다. 인사를 나누는 방식부터 의복, 자리 배치, 사소한 단어 선택에까지 모두 의미가 담긴다. 특히 대내외 선전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중국은 더더욱 그렇다.

 

홍콩 주권 반환 25주년 기념식에서

 

 

▲ 홍콩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펑리위안 여사 <사진= CCTV 캡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1 홍콩 주권 반환 25주년 기념식에 참여하기 위해 홍콩을 찾았다. 지난 2017 홍콩 주권 반환 20주년 기념식에 이어 5 만에 홍콩을 방문한 것이다. 홍콩의 ‘반대 0선거법 개정 이후 ‘중국에 충성하는 홍콩을 만들겠다 이념을 내세워 당선된   신임 행정장관은 해당 식에서 짧은 선서가 끝난   주석에게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했다. 이에 시진핑은 간단한 목례로 답했다.

 

5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2017 7 1 캐리  신인 행정장관은  주석과 당당하게 악수를 나눴다.  주석과 나란히 행사장에 입장하는 모습도 보였다.

 

코로나19 여파로 악수 대신 목례를 택한 것으로  수도 있다. 그러나 코로나19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지난 5년간 홍콩이 많이 변화했다. 2019 송환법 반대 시위와 2020 국가안전법 사태를 겪으면서 홍콩 내부에서의 반중(反中) 감정은  어느 때보다 고조된 상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진핑 주석이 5 만에 홍콩을 방문하여 ‘일국양제 견지를 강력히 피력한 것을 홍콩 시민들이 좋게 볼리 없다.

 

일국양제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일국양제(国两)’  국가 안에  가지 체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1997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반환받으면서 중국이 홍콩을 통치해온 원칙이다.  주석은 해당 기념식에서 “일국양제는 강력한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홍콩의 번영과 안정을 확보할 이고, “일국양제 방침의 최고 원칙이라는 전제 아래 홍콩과 마카오는 기존의 자본주의 제도를 장기간 그대로 유지하고 고도의 자치권을 누릴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홍콩 시민사회와 국제사회는 이에 고개를 내저었다. 2020 ‘홍콩 국가보안법 엄연히 일국양제에서 벗어난 정치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에 반대하는 언론 매체와 민주 진영 인사들은 표면에서 활동할  없게 되었으며, 선거법이 바뀌면서 홍콩의 정치인 선출도 중국이 쥐락펴락할  있게 되었다. 영국과 미국도  사태를 비판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29 트위터에 “홍콩인들의 권리와 자유, 홍콩의 계속되는 진보와 번영이 위협받는 상황이라고 비판했으며, 에이드리언 왓슨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CS) 대변인도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홍콩의 정치인은 감옥에 있거나 재판 중이서나 해외로 망명했다 비난했다.

 

 홍콩과 중국의 갈등은 언제부터 어떻게, 왜 생겼을까?

 

갈등의 시작, 아편전쟁

홍콩과 중국의 갈등의 시작은 아편전쟁이었다. 1839년 당시 청나라와의 무역을 원했던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은 청나라의 아편 무역 금지 조치를 계기로 전쟁을 일으켰다. 청나라는 산업혁명이 일어날 정도로 기술력이 발전했던 영국을 이길 수 없었고, 전쟁에서 패배했다. 전쟁 패배의 대가로 청나라는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조약의 내용 속 '홍콩섬 영구 할양'이 있었다. 이 조항에 근거해 청의 지배를 받던 홍콩섬은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영국은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홍콩섬 주변 지역도 획득하고자 하였다. 청과의 끈질긴 교섭 끝에 영국는 1898년 제2차 북경조약을 통해 홍콩섬 주변 지역들을 99년간 영국이 조차한다는 합의를 보게 되었다.

 

홍콩반환과 일국양제

홍콩 반환은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제2차 북경조약 당시 영국이 조차한 지역은 홍콩섬 주변지역으로 홍콩섬은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개혁개방과 함께 경제 개발을 추진 중이던 중국의 입장에서는 홍콩섬을 포함한 현재의 홍콩 전체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도 흔쾌히 홍콩 전체를 돌려줄 수는 없었다. 지난 99년간 영국의 지배하에 홍콩에서 거주하던 홍콩인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의 대중국 홍콩 반환은 자본주의 체제를 공산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 체제 하의 강대국 간 체면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홍콩 반환은 반환 지역을 설정하는 일에서부터 순탄치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중국의 국가 주석 덩샤오핑은 일국양제라는 묘수를 내놓았다. 홍콩의 할양 후에도 홍콩의 현행 제도 유지를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일국양제 하에서는 홍콩인들의 신분을 보장할 수 있었기에 영국은 현재의 홍콩 전체를 중국에 반환하겠다는 합의를 보았다. 양국은 1984년 중영공동선언을 통해 중국이 홍콩의 정치, 경제 구조를 50년간 유지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리고 이 공동선언의 내용을 기반으로 마침내 1997년 7월 1, 홍콩반환식과 함께 영국은 중국에 홍콩을 반환하게 되었다.

 

반환 그 이후

홍콩 반환 이후, 홍콩은 빠른 속도의 경제적 성장을 보였다. GDP1997년에 비해 20162배이상 성장하였고, 1인당 GDP 역시 2배 가까운 성장을 기록했다. 그뿐만 아니라 무역, 관광,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홍콩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무대로 등장하게 되었다. 홍콩은 일국양제하에서 자본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를 잇는 거점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며 경제적 발전을 거듭했다.

 

 

▲ 홍콩의 야경 <사진 제공=百度>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중국이 일국양제 중 일국에 더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홍콩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홍콩인으로서의 지위를 지키고자 하는 시민들의 의지와는 달리, 중국 공산당이 홍콩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4년 중국 전인대(전국인민대표대회)는 2017 홍콩 행정장관 선거와 관련하여 엄청난 개정안을 내놓았다. 개정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중국 전인대가 홍콩 행정장관 후보자를 선정한다. 이후, 전인대가 선정한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홍콩 시민들의 선거를 통해 행정장관을 선출하게 된다. 이런 방식은 홍콩 행정장관의 자격을 제한하는 것이며, 사실상 중국 정부가 친중국 정치 인사를 선출하겠다는 뜻으로 홍콩 시민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시민들은 이에 분노했고 홍콩 행정장관의 완전 직선제를 주장하며 20149월 민주화 운동을 일으켰다. 이름하여 우산혁명이었다. 79일간 이어진 우산혁명은 비롯 실패로 끝났지만, 홍콩 시민들은 이를 계기로 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홍콩은 중국의 정치적 개입을 막기 위해 크고 작은 수많은 갈등이 있었으며, 2019년 홍콩과 중국의 대립이 최고조로 찍는 대규모 홍콩 시위가 있었다.

 

홍콩 범죄인 인도법이란

2019331일, 범죄인 인도법(송환법)에 반대하며 전개된 시위는 그해 6월에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확산되었다. 이후 장기화된 시위는 송환범 폐지 요구에 더 나아가서 중국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민주화 운동으로까지 그 성격이 확대가 되었다.

 

 

▲ 범죄인 인도법에 반대하며 지난 2019년 홍콩에서 시위가 발생했었다. <사진=CNN>  

 

홍콩 지역에 있는 범죄 용의자를 범죄인 인도협정을 체결한 국가에 인도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다. 원래 홍콩의 범죄인 인도법에는 20여 개 국가와 인도협정을 체결한 상태였지만 중국과 대만 마카오 등의 국가와는 이를 체결하지 않았었다.

홍콩 범죄인 인도법의 개정안 발표

20182월 홍콩 남성이 작년 2월에 여자친구와 대만으로 여행을 갔다가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가 제기된 이래 이 법의 개정안 도입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남성은 홍콩으로 도피했고, 홍콩과 대만 사이에는 범죄인 인도 협약이 없었으므로 대만으로 인도될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홍콩의 범죄인 인도법의 개정안이 발표되었고, 이 개정안 협정 대상국에 중국이 포함되어 있었고 중국이 현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정치범으로 몰아서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는 점을 비판하면서 반대시위가 시작되었다

 

반대시위가 대규모 시위로 번진 이유

해당 시위는 처음에는 홍콩 송환법을 주도한 캐리 람 행정장관에 대한 사퇴를 요구하는 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했던 경찰의 대응에 화가 난 시민들이 사과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로 커졌다.

 

또한, 홍콩 시민들이 송환법에 반대한 이유는 송환법 개정안이 통과되는 순간 더 이상 중국의 사법제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홍콩은 중국의 특별 행정구로 일국 양제라는 시스템 안에서 중국과 다르게 시민들의 자유와 높은 수준의 자치를 약속받아왔다. 또한 사법부의 독립성 역시 협정 하에 보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송환법 채결국가에 중국이 포함되는 순간, 명확한 기준이 없는 공산당의 사법제도 안에서 중국에 반(反) 하는 의견을 가진 정치, 또는 시민들은 분명하지 않은 국가 안보 위반 등의 이유로 기소 당하여 불공정한 재판을 받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홍콩은 중국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게 된다.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의 결말

201994일 홍콩 정부 수반인 캐리 람 홍콩 행정관은 홍콩 TV 연설을 통해 대규모 시위를 촉발한 송환법을 공식 철회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미 반대 시위는 중국의 간섭화를 벗어나가 위한 시위로 변화였고 송환법 철회 이외에도 체포된 시위 대원의 조건 없는 석방 및 불기소, 경찰의 강경 진압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시행 등을 요구하였으나 홍콩 당국은 시위대가 요구한 나머지 사항들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의 송환법 폐기가 발표된 이후에도 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20196, 홍콩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여 홍콩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중국 정부는 대규모 정치적 시위가 일어나질 않길 위해서 새로운 법을 제정하였는데 흔히 홍콩 보안법이라고 불리는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이란

2020528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이하 전인대)는 찬성 2878표와 반대 1표로 홍콩 보안법을 통과시켰고 이어 630일 전인대 상무위원회의 만장일치 찬성 표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서명으로 홍콩 보안법이 제정되었다. 홍콩 보안법은 홍콩의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 부칙 3항에 삽입되었으며 630일 제정 이후 71일부터 그 법적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국가보안법,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중국정부는 홍콩 반환 23주년 기념일(202071일)에 맞추어 홍콩 보안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했다. 홍콩 보안법은 외국 세력과의 결탁, 국가 분열, 국가 정권 전복, 테러리즘 활동 등을 금지, 처벌하는 법으로 최대 무기징역형까지 받을 수 있다. 즉, 홍콩 내 반정부 활동을 금지하고 처벌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판단하는 권한은 중앙이 가지게 되는데, 아래의 상황에서는 중앙정부가 설치한 홍콩 국가안보처(홍콩 주재 국가안보공家安全公署)가 관할권을 가진다. 

 

1.외국 세력이 개입했거나 홍콩 정부가 효과적으로 법 집행을 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

 

2.국가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있는 상황

 

또한 홍콩에서 선거에 출마하거나 공무원이 되고자 희망하는 자는 반드시 중화인민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하여야 하며, 학교를 비롯해 미디어, 인터넷 등의 관리 감독이 강화되었다. 초, 중, 고, 대학교에서는 국가 안보 교육이 시행되고 있다.

 

홍콩, 민주주의의 좌절

일국양제원칙하에 기본적으로 홍콩은 홍콩 의회인 입법회를 통해 법률이 제정되어왔다. 하지만 홍콩 보안법 시행은 2047년까지 유지되기로 약속되어 있던 일국양제를 무효화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정부가 홍콩 법률 제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이다.

 

또한 홍콩 보안법의 시행은 중국 정부의 홍콩 개입을 정당화한다. 홍콩 보안법에 따르면 홍콩을 중국 정부에서 분열시키거나, 전복, 파괴, 내정 간섭한 자는 처벌받게 되는데, ‘어떠한 행위가 이에 해당되는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 정부가 판단한다. 홍콩 국가안보처(홍콩 주재 국가안보공家安全公署), 홍콩 행정장관, 홍콩 보안법 관련 재판관 등 홍콩 내부 고위관직자 역시 중국 정부가 친중 성향의 인사들 임명, 배치하고 있다. 즉, 홍콩 보안법의 실시는 기존의 일국양제원칙을 무시하고 홍콩 내정간섭을 용이하게 한다. 

 

홍콩의 정치적 형세의 변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홍콩 시민들은 수차례 많은 좌절을 느끼면서 홍콩 시민들의 생활적인 부분은 물론이며 정치 및 경제 등 다양한 방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홍콩 시민들의 변화

생활적인 방면에서, 홍콩 시민의 표준어 사용량이 늘었다는 것이다. 영국의 홍콩 반환 전인 1996년에는 표준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홍콩인의 비율은 25.3%에 불과했으나, 2017년에는 48.6%에 이를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다. 이는 중국 체제와 교육 언어와 관련이 된다. 일부 홍콩 대학의 중문과 및 인문대학 등은 중국어 표준 시험 성적을 요구하기도 하며, 실제로 교육되는 수업들도 표준어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앞으로 표준 중국어를 구사하는 홍콩인들은 더욱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뿐만 아니라 홍콩 학교 내에서는 애국교육이 실시되고 금지 도서가 지정되었으며 만리방화벽이라는 검열시스템이 도입되는 등 더 이상 홍콩에서 민주주의를 찾는 것은 어려워졌다.

 

경제적인 방면에서 보자면,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25년 동안 홍콩의 GDP는 두 배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일부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홍콩의 경제 발전은 중국 대륙이 30년간 고속 발전한 덕이 있다며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홍콩은 중국 본토 기업의 해외상장을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GDP가 높게 측정된 이유도 있다. 자본주의적인 홍콩의 은행 시스템을 이용함으로써 중국 본토에서는 인민폐 시장의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홍콩이 자체적으로 경제성장을 했다기보다는, 중국이 홍콩을 국제시장에서의 발돋움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용되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정치적인 방면에서는, 중국이 지지하는 일국양제가 점차 사라지는 양상을 보인다. 중국 헌법 상, 홍콩특별행정구는 행정 관리권, 입법권, 독립적인 사법권을 향유하며, 기존의 자본주의 제도를 유지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위에 명시된 기본적인 권리들이 이미 중국에 의해서 제정되거나 수정된 지 오래이다. 특히 고위직 임명에 중국이 개입하는 등의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왔다.

 

특히, 많은 중국인이 홍콩으로 이주하면서, 현재 홍콩 본래의 문화가 중국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중앙정부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중국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많은 중국 학생들이 홍콩에 있는 대학교에 지원하기도 하며, 현재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인구는 대략 100만 명으로, 홍콩 전체 인구 730만 명의 13.6%를 차지하고 있다. 더불어, 이민정책 및 영주권 조건 등이 어렵지 않은 편이라 홍콩으로 향하는 이주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홍콩이 바라보는 미래

‘일국양제(一國兩制 한 국가 두 체제)’, ‘향인치향(香人治香 홍콩인의 홍콩 통치)’ 그리고 ‘고도자치(高度自治 높은 수준의 자치)’.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당시 중국이 했던 약속이자, 홍콩 시민들이 자신들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바라고 있는 3대 원칙이다.

 

이를 근거로 홍콩 시민이 아닌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국과 홍콩의 합병이 절대악이며,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발생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술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홍콩 시민들에게 합병은 절대선 혹은 절대악으로 판단될 수 없다. 그들의 가치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유경제는 개개인에게 상반된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홍콩 내부에서도 ‘중국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홍콩은 더욱 안정된 사회를 추구할 수 있다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절충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던 1956년의 헝가리는 동유럽의 통일된 공산화를 일구려 노력하는 소련의 침공에 의해 모든 과정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헝가리는 ‘굴라쉬 사회주의(goulash socialism)’라 불리는 새로운 경제·사회 체제를 고안하여 양국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였고, 소련이 붕괴되면서 결과적으로 가장 먼저 공산 체제를 청산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홍콩 시민들에게 헝가리의 사례가 본보기로 적용될 수 있을지, 혹은 중국에 완전한 귀속이 될지, 사실상 자유와 통제의 기로 한가운데 서 있는 홍콩의 미래에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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