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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열전] 영원한 시황제(始皇帝)

서정욱 | 기사입력 2018/05/01 [09:05]

[역사인물열전] 영원한 시황제(始皇帝)

서정욱 | 입력 : 2018/05/01 [09:05]

"법제를 정비하고, 도량형을 통일한 것은 진시황제가 이룩한 업적으로 이 내용 모두를 조서로 남기노라. 앞으로 후대에는 누구도 시황제라 칭할 수 없으며, 오직 그만이 영원한 시황제이니라. 만일 이후의 계승자가 이것을 어기면 성덕하다고 할 수 없다."

 

진(秦) 2세 황제인 호해(胡亥) 때 이사와 풍거질이 동판에 쓴 조서이다.

 

‘만세의 폭군’ 진시황제는 ‘천고일제(千古一帝)’의 위대한 황제인가. 오늘날까지도 끝없는 논쟁에 휩싸여 있는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에 대해 살펴보자.

 

영원한 시황제(始皇帝)

 

 

▲ 출처: baidu image     © 데일리차이나


 

'최초로', 드넓은 붉은 대지 위에 통일된 중국을 건설하고, 문자를 통일하여 한자를 정형화시키고, 군현제를 실시하여 행정구역을 정비하고, 도량형을 통일시켜 경제활동을 활성화시키고…장구한 중국 역사 속에 너무나 많은 것을 창조하여 후세에 무수히 많은 '최초'를 남겨놓은 영원한 시황제 진시황.

 

스스로 공(功)은 오제(五帝) 보다 많고, 땅은 삼황(三皇) 때 보다 넓어 다른 임금들과 똑같이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진시황.

 

그는 “중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역사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마오쩌둥과 더불어 항상 1, 2위를 다투는데, 마오쩌둥이 오늘날의 '사회주의 중국'을 만들었다면, 그는 그 '중국 자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가 중국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마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뉜 채로 발전해 역사의 물줄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은 그의 업적과 달리 사마천의 '사기'나 유향의 '전국책' 등 의외로 소략하다.

 

그나마 이 책들은 백 년 이상 지난 뒤에 씌어진데다, 사실과 전설의 구분이 모호하고, 일부는 의도적인 왜곡을 했다는 의심마저 들고 있다.

 

'자치통감', '사기' 등이 그를 자초의 아들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이미 임신 2개월 상태에서 시집가서 열 달 만에 그를 낳았다고 기록하여 여불위의 아들로 보고 있는데, 팔삭둥이는 있어도 12개월의 만산아는 거의 불가능한 것, 이는 위인의 출생 신화와 반대되는 전형적인 폭군만들기의 예로 봐야겠다.

 

그는 BC 259년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진나라의 왕족 자초(子楚)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자초는 조국에서 그리 세력이 크지도 않았고 관례상 죽을 때까지 조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도 컸다.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다면 자초나 그나 역사에 단 한 줄도 채우지 못한 채 쓸쓸히 사라졌을 가능성이 더 컸다.

 

진나라의 상인인 여불위가 조나라에 갔는데, 우연히 자초를 만나보고는 이렇게 소리쳤다.

 

“특이한 상품(奇貨)이다. 사 놓으면 큰 이익을 보겠구나!”

 

그리고 자초에게 거금을 지원하고, 자초를 당시 진나라의 태자였던 안국군의 양자로 들어가도록 공작했다.

여불위의 투자는 멋지게 성공, 안국군이 즉위하여(효문왕) 불과 사흘 만에 죽자 조나라에서 돌아온 자초가 왕위를 계승했다(장양왕).

 

시대는 영웅을 낳고 영웅 또한 시대를 만드는 것. 시대는 그를 중국 통일을 완성할 수 있는 역사의 무대 위에 올려 놓았고, 그는 이 무대 위에서 결국 성공적으로 6국을 통일하는 웅장한 연극을 연출했다.

 

"진의 병사는 전투에서 세운 공에 따라 그에 걸맞은 상과 작위를 받았다. 전투에서 공을 세우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왕족이라 하더라도 특권을 빼앗아,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이것이 진나라가 마지막 승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사기)

 

엄격한 '신상필벌(信賞必罰)'은 국가 통치의 불변의 요체라고 봐야겠다.

 

분서갱유(焚書坑儒)

 

''복희ᆞ신농ᆞ황제ᆞ요ᆞ순임금은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과 법도가 서로 달랐습니다. 또 하ᆞ은ᆞ주 3대 역시 서로를 그대로 따르거나 잇지 않고, 각각 자신들 나름의 방법을 좇아 천하를 다스렸습니다. 이것은 서로의 정책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중략)

 

신은 간청합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로 하여금 진나라에 관한 내용 이외의 모든 기록을 불태워 버리도록 하십시오. 또 박사관(博士官)이 아니면서 시경(詩經)이나 서경(書經) 그리고 제자백가의 서적을 간직하고 있다면, 모두 지방 관리들에게 바치도록 해, 이것들을 모두 모아 불태워 버리십시오. 또한 감히 시경이나 서경을 들먹이며 현실을 비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일가족을 모두 몰살시키십시오.''

 

이사의 상소문인데, 분서갱유는 흔히 그의 최대 악행으로 거론되지만,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먼저 분서갱유를 제안한 승상 이사의 주장에 "국가에서 인정한 박사들 말고 사사로이 경전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빼앗아 불태우고"라고 되어 있어 떳떳이 경전을 갖고 연구해도 되는 유학자들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한(漢) 문제 때 가의가 진의 멸망 원인에 대해 '과진론(過秦論)'이라는 글을 올렸는데 그의 여러 악행 중 분서갱유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國無常强 無常弱(국무상강 무상약)'', ''영원히 강한 나라도, 영원히 약한 나라도 없다.''

 

''奉法者强 則國强(봉법자강 즉강국), 奉法者弱 則國弱(봉법자약 즉약국)'', ''법을 받드는 사람이 강해지면 나라가 강해지고, 법을 받드는 사람이 약해지면 나라가 약해진다.'' (한비자, 유도편(有度篇))

 

상앙(商鞅) 이래 법가(法家)를 계승하고, 한비자, 이사를 등용하면서 법가적 통치를 더욱 강력하게 실시하여 황제 중심의 일원적 지배체제를 확립했던 진시황.

 

엄격한 법가사상에 기초해 나라를 다스리다 보면 다른 학파의 반발에 따른 약간의 희생은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언론과 사상을 탄압한 조치가 취해진 것은 분명하지만 일반인들이 연상하는 정도의 잔혹함이나 철저함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역사의 진실에 가깝다.

 

실제 기록에는 술사(術士)인 노생과 후생이 진시황을 비판하고 달아나자 460명을 생매장한 기록이 있는데, 이 숫자가 당시 중국 인구 규모에 비해 적다고 하면 죽은 영혼들에 대한 불경이 될런지··

 

장성(長城)

 

 



 

''장성의 남쪽은 모두 중국이다.''

 

"장성에 올라 보지 않았다면 진정한 대장부가 아니다."(마오쩌둥)

 

이민족으로부터 중국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중화민족이 하나로 응집할 수 있는 정신적인 결속력을 제공했던 장성, 역사적·전략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건축학적으로도 탁월한 유적으로 지구촌에 건설된 수많은 인공 구조물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장성.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세운 진시황은 기존에 축조되어 있던 연ᆞ조ᆞ진의 성들을 연결하여 서로는 임조(감숙성 북쪽)에서 동으로는 요동의 연무에 이르는 우람한 장성을 건설한다.

 

그 길이만큼이나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장성의 최종 모습은 17세기에 완성되고, 총 길이는 16,000리 (6,350km)에 달하는데ᆢ

 

장성은 유목 민족과 한족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으로, 진나라의 힘을 상징하는 건축물임과 동시에 중국이 가진 힘의 한계를 나타내는 선이기도 하다.

 

장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성벽이 영국 북부를 동서로 갈라 놓은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성벽인데 그 길이가 118km이니 장성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똑같은 돌로 중국은 성벽을 만들고, 로마는 가도를 만들었는데, 성은 막고 길은 뚫는 것, 이것이 바로 동서양의 차이라고 봐야겠다.

 

험준한 산과 협곡은 물론이고 사막까지 이어진 거대한 장성은 현재 황해와 가까운 동쪽 산하이관에서 서쪽으로 간쑤 성 자위관까지 약 3,000km가 보존되어 있는데ᆢ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건축물이란 이야기부터 공사 기간, 동원된 인원, 건축술, 그리고 수많은 사연까지 장성에 대해서는 신화와 사실이 뒤섞여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필자도 장성을 몇 번 가 봤지만,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건축물이라는 전설은 이미 중국 우주비행사에 의해 허위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실제 달에서는 지구의 가장 높은 산맥도 안 보인다고 하니 이는 결국 장성을 홍보하기 위한 스토리텔링으로 봐야겠다.

 

다만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장성 건설 과정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장성은 그 웅장함만큼이나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 낸 문화유산이라는 것.

 

''성군은 백성을 사랑해서 거대한 기념물을 남기지 않는다. 폭군은 장성 같은 기념물을 남긴다. 그래서 성군은 자기 시대의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왕이고, 폭군은 그 시대는 괴롭지만 자자손손 혜택을 주는 왕이다.''

 

필자가 장성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진시황 또한 시대의 폭군이지만, 후세에는 성군으로 봐야 할지ᆢ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발사되는 비밀스러운 장치도 갖추었다.'' (사기)

 

7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10년 넘게 공사를 하여 현존하는 단일 무덤 가운데 가장 큰 진시황릉.

 

그의 거대한 무덤에 관한 이야기는 예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왔는데,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던 전설은 20세기 들어 하나 둘씩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시안 동북쪽에 한 면이 400m가 넘고 높이가 76m에 이르는 거대한 무덤을 건설했는데, 중국 황제의 무덤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된 이 무덤은 현재 발굴하지 않고 보존 중이다.

 

두 겹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황궁이 있는 진시황릉의 배치는 당시 수도 셴양의 도시 계획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데, 궁전과 제국, 세계의 진정한 비례 모형이다.

 

또한 불멸의 생을 꿈꿨던 그는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병사와 말의 모형을 흙으로 빚어 실물 크기로 제작한 병마용을 만들었는데, 이는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두루 갖추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1호 병마용갱에는 살아있는 사람을 모델로 만들어진 6,000여 점의 도용이 있는데, 얼굴 표정은 물론, 직위에 따른 갑옷과 머리 모양, 자세 등 어느 한 곳도 똑같은 것이 없다고 하니 정말 불가사의 그 자체다.

 

다만 병마용은 만들어질 당시에는 모두 컬러로 채색된 도용이었는데, 발굴 과정에서 햇빛에 노출되자 불과 몇 시간만에 모두 색이 바래버렸다고 하니 문화재 발굴 기술의 후진성이 참으로 안타깝다.

 

죽음

 

스스로의 공업(功業)을 상고(上古) 황금 시대의 신화적 성군(聖君)들인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업적과 견줄 만하다고 자부하면서 '시황제'로 자칭했던 진시황,

 

불사의 약을 구해 하늘의 뜻까지 바꾸려 했던 그는 순행길에 나섰다가 결국 후사도 결정하지 못하고 사구(沙丘)에서 49세의 나이로 객사한다.

 

그는 북방에 있는 태자 부소에게 황위를 물려 준다고 유언했으나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가 음모를 꾸며 호해를 2세 황제로 세우는데, 그들의 음모는 성공했지만 그 결과는 결국 돌로 자신의 발등을 찍은 것, 이들 세 사람의 말로는 모두 비참하게 끝난다.

 

창건과 멸망의 기간이 겨우 15년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단명했지만, 가장 중요한 왕조였던 진 제국, 거대한 통일 제국을 건설하여 오늘날 차이나(China)를 만든 진(Chin) 제국, 결국 그의 사후 3년만에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진은 작은 땅과 천승의 권력을 가지고 같은 서열인 8주의 제후를 불러들여 100년 넘게 조회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천하를 한 집안으로 만들고 효산과 함곡관을 궁전으로 삼았다.

 

그런데 한낱 평범한 사내 하나가 난을 일으키자, 황제의 종묘가 무너지고 남의 손에 죽임을 당해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인의를 베풀지 않은데다 공격할 때와 지킬 때의 형세가 달랐기 때문이다.''(사기)

 

“무릇 천하를 정복할 때는 사술과 무력을 중시하며, 천하가 통일된 후에는 백성에게 권력이 잘 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천하를 취할 때와 지킬 때의 방법은 다른 것이다.

 

그러나 7국이 할거하던 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천하의 임금 노릇을 하면서도 예전의 방법을 답습하고 혹독한 정치를 거두지 않았으니, 그만큼 빠르게 멸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의, 과진론)

 

진의 멸망에 대한 역사의 준엄한 평가인데, 민심이 곧 천심인 것, 당시 민초들의 노랫가락 한 토막 들어보자.

 

호(胡, 오랑캐)에게 망하리란 말 듣고

하늘 높이 만리장성을 쌓았네

백성들의 원성소리 높아져도

성벽은 낮아질 줄 몰랐네

허나 누가 알았으랴

아버지의 말을 거스르고

형까지 죽인 호해가

술사들이 말하는 바로 그 호(胡)였음을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사이의 고리가 불신과 증오로 채워질 때 국운은 기울어 진다."

 

토인비의 위 명언은 동서와 고금을 불문하고 적용되는 역사의 진리라고 봐야겠다.

 

평가

  

문자와 화폐, 도량형 그리고 법 체계까지 일원화하여 오늘의 중화정신의 밑거름이 되게 한 무법무천(無法無天)의 독재자 진시황,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진은 전국을 거쳐 천하의 왕이 되었음에도 그 방법을 바꾸지 않았고 정치도 고치지 않았다. 이는 취하고 지키는 바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홀로 고립된 채 천하를 소유하려 했기에 그 멸망이 서서 기다릴 정도였던 것이다.

 

만약에 진왕이 지난 세대의 일을 따져보고 은주의 자취를 참고하여 그 정치를 통제했다면 위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사기'에 있는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다.

 

“진시황은 중국 봉건사회의 제일 유명한 황제입니다. 나도 진시황입니다. 린뱌오(林彪)가 나를 진시황이라고 욕했습니다. 중국은 예부터 두 파로 나뉩니다. 한 파는 진시황이 좋다고 말하고, 다른 한 파는 진시황이 나쁘다고 말합니다. 나는 진시황에 찬성하고 공자에 반대합니다.”

 

생전에 스스로를 진시황의 후예로 생각한 마오쩌둥의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다.

 

진왕조 멸망 5년 뒤 육가라는 사람이 한 고조 유방에게 시(詩)와 서(書)로 정치의 도리를 간했는데, 교양이 없던 유방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천하는 말을 타고 공격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현학적인 시와 서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폐하는 말을 타고 천하를 공격했지만 천하를 말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과거 탕왕·무왕은 정권을 잡고 바로 민심에 따라 천하를 다스려 오래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진시황이 이러한 이치를 파악하여 백성을 잘 대접하고 인의(仁義)를 베풀었다면 지금 세상 어디에 폐하가 설 자리가 있겠습니까!"

 

''可以馬上得天下, 不可以馬上治天下'' (가이마상득천하, 불가이마상치천하)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순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는 것, '역취순수(逆取順守)', '천하를 얻을 때는 무력에 의해 정도에 어긋날지라도 통일 후에는 백성을 인의로서 잘 다스려야 하는 것.'

 

결국 그는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리려고 하였고, 이것이 바로 그가 무력에 의한 '역취(逆取)'에는 성공했지만, 인의에 의한 '순수(順守)'에는 실패한 이유다.

 

비록 영원불멸의 제국의 꿈은 허무하게 스러졌지만 그 그림자는 길었던 진시황.

 

'득천하(得天下)'와 '치천하(治天下)'의 리더쉽은 엄연히 구별될 수밖에 없는 것.

 

긴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몰듯 천하를 몰아 '득천하'에는 성공했지만, 회초리와 몽둥이로 천하를 계속 매질하여 '치천하'에 실패한 것이 결국 그의 최종 실패의 원인이 아닐지ᆢ

 

글·서정욱 변호사(전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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