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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열전] 중국 초사(楚辭)의 완성자, 굴원(屈原)

서정욱 | 기사입력 2018/04/20 [14:58]

[역사인물열전] 중국 초사(楚辭)의 완성자, 굴원(屈原)

서정욱 | 입력 : 2018/04/20 [14:58]

長太息以掩涕兮(장태식이엄제혜) 

긴 한숨 쉬며 눈물을 감추노라

哀民生之多艱(애민생지다난) 

백성들 삶에 고초가 많음이 애달파

余雖好脩姱以鞿羈兮(여수호수과이기기혜) 

내 비록 고결하고 조심한다고 했으나

謇朝誶而夕替(건조쇄이석체) 

아침에 바른 말 했다고 저녁에 쫓겨났네

旣替余而蕙纕兮(기체여이혜양혜) 

혜초(향초 이름)를 둘렀다고 날 버리시나

又申之以攬茝(우신지이람채) 

구리때(향초 이름)까지 두루고 있었으니

亦余心之所善兮(역여심지소선혜) 

그래도 내겐 선한 것이기에

雖九死其猶未悔(수구사기유미회) 

비록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으리

굴원이 쓴 '이소(離騷)'의 일부죠.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로 '이소(離騷)', '어부사(漁父辭)'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긴 굴원(屈原)에 대해 살펴본다.

 

 

▲ 굴원(출처: 바이두)     © 데일리차이나

 

 

생애

 

“나는 맑은 물에서 나는 향초인 강리(江離)와 숲 속에서 나는 향초인 백지(白芷)를 몸에 걸치고, 연보라색 향초인 추란(秋蘭)을 실로 꿰어 노리개로 찬 듯 청렴 결백했다.”

 

중국 초사(楚辭)의 완성자로 오늘날까지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는 굴원, 그는 BC 343년(?) 중국 호북성(湖北省) 자귀현(秭歸縣)에서 태어났는데 초나라의 왕족과 동성(同姓)이며, 이름은 '평(平)'이다.

 

견문이 넓고 의지가 굳세었으며, 치란(治亂)에 밝았고, 문사(文辭)에도 능숙했던 그는 젊어서부터 초나라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26세에 좌도(左徒)의 중책을 맡아 내정과 외교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운명은 화친과 단교를 거듭하는 초나라와 진(秦)나라, 제나라, 이 삼국의 요동치는 외교 관계에 따라 등용과 방축(放逐)을 되풀이됐다.

 

또한 그의 정치적 부침의 한 원인은 왕의 총애를 받아 요직에 임용된 그를 시기한 기득권 대신들의 투기와 모함에 있기도 한데··

 

“나는 난초를 믿을 만하다 여겼는데, 아아 속 비고 모양만 훌륭해라. 그 아름다움 버리고 세속 좇아 구차스레 흔한 꽃 속에 끼었어라.”

 

그는 기존의 대신들의 훼절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꼬집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추방과 등용을 반복하게 된 원인이었다.

 

이소(離騷)

 

모두 373행 2,490자의 방대한 시로, 그의 이상과 행적을 서술하고 있는 '이소'.

 

이 작품은 그가 유랑 중에 쓴 대표적 작품으로, 천고에 빛나는 낭만주의의 걸작이다.

 

'이소(離騷)'의 뜻은 동한(東漢) 때 반고의 '이소찬서(離騷贊序)'에 "이는 어려움을 만나는 것이고, 소는 근심이다. (離, 遭也, 騷, 憂也.)"라고 한 것으로 보아 '불행을 만나 지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견해도 있지만 생략)

 

나는 고양씨의 후예이며, 

백용의 아들로서, 

인의 해인 그 정월, 

경인의 날 이 몸 태어났네.

帝高陽之苗裔兮, 

朕皇考曰伯庸, 

攝提貞于孟陬兮, 

惟庚寅吾以降.

 

이와 같이 시작한 시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다 끝났다! 

이 나라에는 나를 알아주는 이 없는데, 

나라를 생각해서 무엇하겠나? 

바른 정치 위하여 손잡을 이 없으니, 

나는 은나라 때 팽함을 따라 죽으리.

亂曰 : 已矣哉! 

國無人莫我知兮, 

又何懷乎故都, 

旣莫足與爲美政兮, 

吾將從彭咸之所居.

 

평생을 어두운 임금을 깨우쳐 나라를 바로 잡는데 바친 굴원. 그에게는 충정을 알아주는 임금도, 지기도 없었다.

 

그렇다고 초나라를 버리고 떠나자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義)가 어긋나는 일.

 

결국 그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운명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 속 깊이 사모하던 팽함을 따라 죽고자 결심한 것이다.

 

어부사(漁夫辭)

 

 


 

조정에서 쫓겨나 머리칼을 풀어 흐트러뜨린 채 장강(長江) 주변을 방황하던 굴원.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몸은 고목처럼 마르고 얼굴은 초췌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를 알아본 어부가 있었다.

 

"아니, 삼려대부(三閭大夫)가 아니십니까? 어쩌다가 이런 곳에까지 왔습니까?"

 

이에 그는 이렇게 답하죠.

 

"온 세상이 혼탁하지만 나 혼자만이 맑고 깨끗했으며, 뭇 사람들 모두가 술에 취해 있지만 나홀로 깨어 있어 그들이 나를 쫓아 냈다네."

 

'중취독성(衆醉獨醒)', '모두 취해 있는데 홀로 깨어 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불의와 부정을 저지르고 있지만 혼자 깨끗한 삶을 살아 쫓겨 났다는 뜻이다.

 

그러자 어부가 말한다.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거나 막히지 않고 능히 세상을 따라 옮기어 가는 것이니 세상 사람들이 다 혼탁하면 왜 그 진흙을 휘저어 물결을 일으키지 않으며, 뭇사람이 다 취했다면 왜 그 술지게미를 먹고 박주(薄酒)를 마시지 않고는 무슨 이유로 깊은 생각과 고매한 행동으로 스스로 추방을 당하셨소?"

 

그러자 그가 다시 말한다.

 

"내가 듣기로, 막 머리를 감은 자는 반드시 관을 퉁겨서 쓰고 막 목욕을 한 자는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 하였소. 어찌 몸의 깨끗한 곳에 외물의 더러움을 받겠소? 차라리 상강에 뛰어들어 강 물고기의 배속에서 장사 지낼지언정 어찌 희디흰 순백으로 세속의 먼지를 덮어 쓴단 말이요?"

 

이때 어부가 빙그레 웃고는 배의 노를 두드려 떠나가며 노래를 부른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滄浪之水濯兮, 可以濯吾足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 끈을 씻으리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다.

 

그 어부가 누군지, 실존 인물인지, 가상의 인물인지 기록상 도저히 알 순 없지만,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 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겠다는 그 삶의 철학은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목숨으로 간하다 결국 죽어 이 세상의 '유'(類, 모범)가 된 굴원,

 

기록을 보니 그가 멱라수에 투신하여 죽은 날이 음력 5월 5일 단오날인데 중국에서는 이날을 '문학의 날'로 기린다고 한다.

 

단오날에 댓잎에 싸서 먹는 쫑쯔(粽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음식으로 쫑쯔를 강물에 던져 물고기들이 그의 시신을 뜯어먹지 못하게 했다는 풍속이 전해진다고 한다.

 

마치며

 

"그 문장은 간략하되, 그 내용은 자세하고, 그의 의지는 깨끗하며, 그의 행동은 겸손하다. 그 문장에서 작은 것을 비유했으나 그것이 지칭하는 것은 매우 크며, 사소한 예를 들었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심원하다. 그의 의지가 깨끗했기에 그가 비유한 사물들이 향기를 발하고, 그의 행동이 겸손했기에 죽을지라도 고국을 멀리하려 하지 않았다.

 

진흙구덩이에 빠져 더럽혀질지라도,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세속의 외부로 헤쳐 나와서 세속의 쌓인 때를 덮어쓰지 않았으니, 그는 결백하게 진흙 속에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러한 지조를 미루어보건대, 그야말로 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그에 대해 평한 글이다.

 

"사기(史記)는 운율 없는 '이소(離騷)'다." (루쉰)

 

필자가 중국의 지전화이(季鎭淮)가 쓴 '사마천 평전'을 보니 사마천이 직접 굴원이 자살한 현장을 발로 답사하며 그 지방의 촌로들에게 자세한 내용을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말 감동을 받았다.

 

'역사의 조물주'로 불리는 사마천, (량치차오)

 

글자 한 획에 목숨이 날아가는 엄혹한 환경에서 한 구절 한 구절 철저한 고증을 통해 뼈처럼 앙상하게 남아 있는 역사적 사실에 피와 살을 입힌 사마천.

 

얼마 전 경주에 갔다가 역사적 현장은 하나도 보지 못하고 밤새 '금주(噙酒)'만 한 필자 자신이 부끄럽다.

 

역시 필자는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등 '술의 고향'을 답사하는 게 맞는 건지··

 

氷炭不可以相竝兮 (빙탄불가이상병혜)

얼음과 숯은 서로 함께 합칠 수 없으니

吾固知乎命之不長 (오고지호명지부장)

내 진실로 생명의 짧음을 알겠도다

哀獨苦死之無樂兮 (애독고사지무락혜)

외롭고 괴로운 죽음이 즐겁지 못함을 슬퍼하고

惜矛年不未央 (석모년불미앙)

내 나이 아직 젊었음을 애석히 여기노라

 

한(漢) 무제 때 명신 동방삭(東方朔)이 그를 추모하며 쓴 시다.

 

"길은 아득하고 까마득히 멀지만 나는 오르내리며 찾아 나서노라"

 

그의 마지막 말인데, 항상 멀리 보고 차근히 밟아가는 독자가 되길··

 

글·서정욱 변호사(전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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