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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시 감상]대학자 주희(朱熹)의 관서유감(觀書有感)

서정욱 | 기사입력 2018/01/10 [10:56]

[중국 고전시 감상]대학자 주희(朱熹)의 관서유감(觀書有感)

서정욱 | 입력 : 2018/01/10 [10:56]

반 이랑 모난 연못에, 거울 하나 열렸는데
하늘 빛, 구름 그림자 함께 배회하고 있네
묻노니, 어찌하여 그처럼 맑을 수 있냐고 하니
살아있는 물이 흘러나오는 근원 있어서라네
 
半畝方塘一鑒開(반무방당일감개)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問渠那得淸如許(문거나득청여허)
爲有源頭活水來(위유원두활수래)
 
중국 송나라 때의 대학자 주희(朱熹)의 '관서유감(觀書有感, 책을 보고 느낌이 있어)이란 시다.
 
본래 물의 근원이 없는 작은 연못도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원두(源頭)가 있어서 끊임없이 활수(活水)가 흘러 들어오기 때문에 맑을 수 있는 것,
 
사람도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과 학문을 받아들여야만 맑은 못물처럼 심성이 맑아질 수 있겠다.
 
선대 유학자들의 성과를 집대성하고 유학의 방향을 새롭게 전환시킴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사상계의 지형도에서 커다란 부동(不動)의 산맥으로 자리 잡은 성리학의 창시자 주희,
 
그는 1130년 일가가 전란을 피해 임시로 거처하던 복건(福建) 남검주 우계현에서 아버지 주송(朱松)과 어머니 축씨(祝氏)의 삼남으로 태어났는데 기록을 보니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문장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지적으로 매우 조숙했다고 한다.
 
“나는 5, 6세부터 생각에 잠겨 괴로워했다. 대체 천지사방의 바깥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사방은 끝이 없다고들 사람들이 말하지만 나는 꼭 끝이 있을 것만 같았다.”
 
18세 때 지방의 과거 예비시험 해시(解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수도 임안에서 본시험에 합격한 주희,
 
다양한 관직에 간헐적으로 임명됐지만, 그 대부분은 실권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고 관료로서보다는 학자로서의 주희가 진면목이었다.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사자(四子)라는 이름으로 한데 모아 새롭게 간행한 주희,

 

▲ 사서(바이두)     © 데일리차이나



 한당(漢唐) 시대 유학을 오경(五經) 중심의 유학, 송대(宋代) 이후 유학을 사서(四書) 중심의 유학이라 하는 데, 이는 결국 주희의 업적에 따른 것.
 
1313년부터 1912년까지 사서(四書)는 중국의 학교 교육과 관료 선발시험에서 공식적인 기본 교재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과거 시험을 보려는 사람들의 필독서였다.
 
주희는 사서(四書)를 집주(集注)하면서 자연적인 올바른 이치(理)와 그것이 인간 본성으로 내면화된 성(性)을 중심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이른바 성리학(性理學)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주희의 성리학은 오랫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를 지배해왔고, 특히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주자(주희)가 이미 완벽하게 밝혀 놓았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다만 그의 이치를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자의 말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주장을 하거나 주자와 다른 경전의 주석을 다는 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일 뿐이다.”
 
조선 후기의 대학자 송시열의 주장이다.
 
“나는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기록을 보니 평생 동안 주희가 편찬한 책은 80여 종, 남아 있는 편지 글은 2천여 편, 그의 대화를 기록한 대화록이 140편에 달하며 그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학자들이 467명에 달한다고 한다.
 
필자가 최근 김도환이 쓴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 (서연문답)'라는 책을 읽었는데 대부분 주희의 편지를 놓고 정조와 신하들이 토론하는 내용이다.
 
'一刻千金(일각천금)' '아무리 짧은 시간도 귀중하기가 천금과 같다.'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시를 한 편 더 감상해 보자. '偶成(우성)'이라는 시다. '우연히 지어진 시' 치고는 정말 절창이다.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로학난성)
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불가경)
未覺池塘春草夢(미각지당춘초몽)
階前梧葉已秋聲(계전오엽이추성)
 
소년은 쉬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연못의 봄풀이 꿈을 아직 깨지도 않았는데
섬돌 앞 오동나무 잎은 이미 가을 소리로구나
 
“최근 우리의 도(道)는 세상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세력도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도를 향한 후학들의 열의가 대단한 것은 하늘의 뜻이라 하겠습니다. 늙고 병든 제가 삶의 막바지에 이르고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황간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정말 '일촌광음'도 가볍게 쓰지 않은 '성실(誠實)' 그 자체였다.
 
66세 때 한유의 전집을 교정한 '한문고이(韓文考異)'를, 69세 때 '초사집주(楚辭集註)'를, 70세 때 '후어(後語)'와 '변증(辨證)'을 완성한 주희,
 
수많은 탄압과 질병에도 불구하고 죽는 순간까지 학문을 향한 그의 열정은 잦아들 줄 몰랐다.
 
1200년 3월 9일 새벽, 제자들을 곁으로 불러 가까스로 붓을 들었지만 붓을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던 주희, 낮이 되어 조용히 눈을 감는다.
 
주희의 사실상의 유언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병문안 온 제자들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괜히 여러분을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오게 했구나. 하지만 도리(道理)라는 게 본래 그런 것이기는 하지. 여러분 모두 힘을 모아 열심히 공부하라. 발을 땅에 굳게 붙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學問(학문)은 如逆水行舟(여역수행주)하여 不進則退(부진즉퇴)니라. 欲速則不達(욕속즉부달)하고 見小利則大事不成(견소리즉대사불성)이니라.' (논어)
 
'학문은 물을 거슬러 가는 배와 같아서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나느니라. 빨리 하려 하면 이루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면 큰 일이 이루어지지 않느니라.'
 
항상 발을 땅에 굳게 붙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길··
 
"지금 그 길이 그대 갈 길이다. 달리 무슨 길이 있겠는가?"
 
그의 어록으로 마친다.
 
글·서정욱 변호사(전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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