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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열전]중국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毛澤東)

서정욱 변호사 | 기사입력 2018/03/14 [14:44]

[역사인물열전]중국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毛澤東)

서정욱 변호사 | 입력 : 2018/03/14 [14:44]

"중국인민참기래(中國人民站起來)", "중국 인민은 떨쳐 일어났다."

 

마오쩌둥(毛澤東)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당시 천안문광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한 말이다.

 

14억 중국인들로부터 애정과 동정, 존경과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는 중국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에 대해 살펴보자.

 

대장정 전까지

 

▲ 마오쩌둥_바이두 이미지     © 데일리차이나

 

1893년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태어난 마오, 그는 어릴 때부터 지독한 책벌레였다.

 

"삼복사온(三復四溫), 세 번 반복해서 읽고 네 번 익혀라."  

 

그만의 독서법인데 그는 ‘붓을 움직이지 않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1918년 창사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평생 스승 양창지 (楊昌濟)의 도움으로 베이징대에서 도서관 사서 보조로 일하는데 이때 '신청년'에 실린 리다자오(李大釗)의 글 ‘볼셰비즘의 승리’를 읽고 공산주의에 눈뜨게 된다.

 

1921년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1차 당대회에 창사 대표로 참가한 마오, 이후 그는 당 조직 사업에 박차를 가한다.

 

이 무렵 그는 양창지의 딸 양카이후이(楊開慧)와 동거를 시작하는데, 1922년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이 태어난다. (양카이후이는 국민당군에 사살당하고, 마오안잉은 6.25 때 북한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

 

"세상의 절반은 여자가 받치고 있다.”고 할 만큼 여성의 '인권'에 투철했던 마오, 그는 단지 영웅호색이란 말로 넘어가기에는 좀 심할 정도로 여성과의 '사랑'에도 투철했다.

 

대장정(大長征)

 

장제스의 추격을 피해 약 1만 5천여 킬로(?)에 달하는 중국 공산당의 역사적 대행군,

 

1934년 10월경부터 약 1년여간 중국 공산당은 죽음과 고통으로 가득 찬 악몽 같은 행군을 이어간다.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너 병력의 90%가 죽고서야 겨우 옌안에 도착한 대장정,

 

이 결과 혁명 근거지가 중국 동남부에서 서북부로 옮겨졌으며, 1935년 1월 '쭌이회의(遵義会議)'에서 마오는 확고부동한 지도자로 부상한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에 격렬한 전투를 수반한 채 펼쳐진 368일간의 숨바꼭질, 살아 남는 것이 승리인 전쟁,

 

공산당은 이를 '항일구국전쟁을 위한 대장정'이라 하고 국민당은 '군사상 유례없는 대패주'라고 하니 역시 역사는 상대적인 듯··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10.1)

 

진시황, 유방, 이연, 주원장, 칭기스칸, 누르하치··

 

모두 중국을 통일한 영웅들이나 이들은 언제나 멸망한 나라와 본질적으로 똑같은 나라를 세웠다.

 

즉, 왕조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황제 1인 전제국가가 2천년 이상 지속된 것.

 

마오쩌둥과 장제스 

 

봉건적 전제국가가 무너진 곳에 마오는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주의 국가를, 장은 자유시장경제의 자본주의 국가를 세우려 했는데,

 

정치가 유혈 없는 전쟁이라면, 전쟁은 유혈 있는 정치인 것, 결국 민중의 지지를 얻는 정치에서 장이 패한 것이 전쟁에서도 패한 원인이었다.

 

즉,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으로 민중에게 다가간 마오를 이기는 길은 더 깨끗하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이념, 즉 인간의 얼굴을 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로 맞서야 함에도 부패한 총칼로 제압하려고 한 것이 장의 실패 요인이었다.

 

"민중의 충성과 지지 없는 정권은 사상누각이다."

 

불변의 진리이자 역사의 교훈이다.

 

문화혁명

 

▲ 마오쩌둥_바이두     © 데일리차이나

 

한때 ‘만민 평등과 조직 타파를 부르짖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문화혁명,

 

이 혁명은 1981년 열린 중국 공산당 제11기 제6차 회의에서 ‘당·국가·인민에게 건국 이래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되며 역사적 평가에서 종언을 고한다.

"공칠과삼(功七過三), 공이 7이고 과가 3이다."

 

부도옹(不倒翁) 덩샤오핑이 그에 대해 한 평가인데 원한에 찬 '부관참시'의 정치적 보복 대신 잘못된 역사도 반면교사로 삼아 역사 발전의 토대로  삼은 것이 결국 오늘날 중국이 있게 된 원동력이 아닐지··

 

마치며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중국 역사상 최초로 민중이 주인 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든 마오,

 

그러나 6.25를 겪은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10년에 걸친 문화혁명의 폐해와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중국인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마오,

 

그의 정치적 공과에 대해서는 14억 중국 인구보다 더 많은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사후 40여 년간의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그의 초상이 새겨진 위엔화는 세계를 누비고 있다는 것.

 

총 249권이나 되는 자치통감을 17번이나 읽고 평석까지 하였으며, 아직도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애송할 정도로 한시에도 뛰어났던 마오,

 

평생 헌 옷 입기를 즐겼고, 꿰맨 옷이나 양말차림으로 외국 손님을 맞기도 한 인간적인 지도자 마오,

 

"하늘은 곧 비를 내리려고 하고, (과부가 된)어머니는 시집을 가려고 하는구나. 가라고 해라."

 

린뱌오(林彪)가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도망친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그가 한 말인데 이와 같이 '운명에 순응하는 낙관적인 사고'야 말로 그의 최종 승리 비결이 아닐지··


글·서정욱 변호사(전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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