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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열전]중국 대항해가 정화(鄭和)

서정욱 변호사 | 기사입력 2018/03/08 [12:47]

[역사인물열전]중국 대항해가 정화(鄭和)

서정욱 변호사 | 입력 : 2018/03/08 [12:47]

“일찍이 크고 작은 30여 나라를 찾아, 십만 리의 바닷길을 다녔네. 망망대해에서 산처럼 큰 파도가 하늘을 엎을 듯이 몰아쳤다네. 보이느니 안개 자욱하게 덮인 바다 틈틈이 낯선 이국의 풍경이라네. 돛을 높이 올려 밤낮으로 바다를 달리니, 파도가 뱃전을 때리고, 그 파도를 우리 배가 뛰어넘었네.”

 

사상 초유의 해외 대원정을 통해 중국의 국력을 만방에 떨친 정화(鄭和)에 대해 살펴보자.

 

▲ 정화_바이두     © 데일리차이나


 

환관이 되기까지

 

수려한 외모와 온화한 품성, 병법과 지략에 밝고, 학문에 통달하여 '완벽한 인간'으로 평가되는 정화,

 

그는 1371년 윈난성 쿤밍에서 태어났는데, 본래 이름은 '마화(馬和)'이고, 색목인(色目人)으로 불리던 중동 계통의 피를 받은 이슬람교도다.

 

그가 환관이 된 이유는 나중에 영락제가 되어 그에게 대원정을 지시하는 연왕 주체(朱棣)가 원나라의 세력이 남아 있던 쿤밍을 정벌하여 성인 남성은 모두 학살하고, 어린 소년들은 거세시켰기 때문이다.

 

흔히 환관은 군주의 최측근으로 난세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삼국지의 영웅 조조의 양할아버지인 조등(曹騰)처럼 크게 공을 세워 양아들을 들이는 상을 받기도 하는데, (참고로 이 상은 환관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포상임) 그 또한 환관 중 대표적인 충신으로 봐야겠다.

 

정난지변(靖難之變)

 

성현의 면모, 호걸의 기풍, 도적의 성품을 동시에 가져 중국 역사상 한 개인이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예로 평가되는 명태조 주원장,

 

1398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22세의 나이로 황제가 된 손자 건문제(혜종)는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숙부들을 제거하기 위해 세력이 약한 번왕들부터 차례차례 남경으로 불러들여 제거하기 시작한다.

 

이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가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니 바로 '정난지변'이다.

 

'황제를 에워싸고 있는 간신들을 처단하여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황제권에 도전한 것이다.

 

단종과 수양대군의 싸움에 비견되는 이 전투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뿌린 4년 동안의 치열한 내전 끝에 결국 황위는 숙부에게 돌아가니 이가 바로 태종(후에 '성조'로 개칭) '영락제(永樂帝)’다.

 

실제 영락제와 세조는 ‘친인척’이기도 한데, 누이를 영락제의 후궁으로 들인 한확의 딸이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부인(인수대비)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때 큰 공을 세운 그는 환관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은 내관태감이 되고 '정(鄭)'이라는 성도 하사 받는다.

 

사상 초유의 대원정

 

▲ 바이두 이미지     © 데일리차이나


 

중국 역사상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 강희제와 더불어 가장 뛰어난 정복군주로 평가받는 영락제,

 

1405년부터 영락제는 그에게 동원된 선박이 최대 3,500척, 인원은 3만 명에 달하는 대함대를 이끌고 29년 동안 총 7차에 걸쳐 인도, 중동, 아프리카까지 이르는 대원정을 지시한다.

 

당시 그가 탔던 배의 규모는 길이가 122m, 선폭이 52m이고, 9개의 돛대가 달려 있었으며, 배수량은 약 2,700톤으로 추측되는데, 1492년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상륙했던 콜럼버스의 배(약 200톤)와 비교하면 항공모함과 조각배 차이로 봐야겠다.

 

이와 같은 대원정의 동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의견이 분분한데, 먼저 황궁 함락 당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시체를 찾지 못했던 건문제를 찾기 위한 수색이라는 견해가 있다.

 

다음으로 화려하고 진기한 것을 좋아했던 영락제가 일반적인 진상품에 싫증이 나서, 머나먼 곳에서 진귀한 물건을 가져오도록 한 극히 개인적인 동기였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동원된 선박이나 인원의 규모로 봤을 때 이와 같은 사소한(?) 동기가 일부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만방에 명나라의 위세를 떨쳐 중화와 변방이라는 전통적인 국제관계를 이룩하려는 정치적 동기가 주된 원인이었다고 봐야겠다.

 

영광과 쇠락

 

유럽의 신항로 개척보다 70여 년 더 빠른 시기에 전 세계 30여 나라를 원정하며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던 정화, 그러나 그와 그의 함대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페인의 무적함대처럼 누군가와 싸워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 스스로 배의 목재를 뜯어내고 항해 기록을 불살랐다.

 

“보물배의 원정은 아무 소용없는 일에 국력을 낭비할 따름이니 마땅히 중단해야 한다.”

 

영락제의 사후 뒤를 이은 홍희제나 선덕제는 고루한 유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결국 외국과의 접촉을 통제하고, 배가 중국의 항구를 드나드는 일을 엄격히 금지하는 해금(海禁) 정책을 실시한다.

 

결국 그는 1433년 마지막 항해 도중 호르무즈 근방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는데 그의 시신을 싣고 돌아온 함대는 두 번 다시 출항하지 못한다.

 

상업이 발달하고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 반드시 새로운 사상이나 문화가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

 

결국 영락제 사후 시행된 철저한 해금정책은 농업 생산을 바탕으로 유교 이념과 전통 문화를 내세우며 살던 기득권 계층과의 갈등으로 봐야겠다.

 

마치며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무역을 지배하고, 무역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부를 지배하며, 마침내 세계 그 자체를 지배한다."

 

영국의 군인이며, 탐험가인 월터 롤리의 말이다.

 

이 말은 대항해시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지배한 세계사에 대한 설명이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봐야겠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육상자원은 100년 전후로 고갈될 것으로 예측되지만 해저자원은 전 세계가 1만년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무한한 자원이 매장돼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결코 바다를 포기할 수는 없겠다.

 

환관이라는 '불완전한 남자'의 몸으로 완벽한 남자도 해내지 못한 불멸의 업적을 이룩한 '완벽한 인간' 정화,

‘바다의 실크로드’로 불리는 남해 항로를 개척하고, 중국인들의 활발한 해외진출을 촉진시켜 화교의 모태를 만든 정화,

 

'만약 그의 사후 명나라가 해금정책을 취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지만 이후 바다의 주도권이 서양으로 넘어가 유럽의 해상세력이 바다를 지배하면서 결국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까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희생양이 된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신라시대의 장보고 장군 등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한민족은 원래 활발한 해상활동으로 바닷길을 적극 개척해왔던 우수한 해양 민족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것,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로선 대도약과 웅비의 활로를 결국 바다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

 

해양주권 확립, 글로벌 해양 경제영토 개척, 해양관광 등 해양 강국은 결코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 것,

 

부족한 이 글이 ‘잊혀진 영토 바다'에 대한 조금이나마 새로운 관심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글·서정욱 변호사(전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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