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이징뉴스

[역사인물열전]성리학 집대성한 주자(朱子)를 아나요?

서정욱 변호사 | 기사입력 2018/02/19 [12:36]

[역사인물열전]성리학 집대성한 주자(朱子)를 아나요?

서정욱 변호사 | 입력 : 2018/02/19 [12:36]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로학난성)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가 어려우니

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불가경)
한순간의 세월도 헛되이 보내지 마라

未覺池塘春草夢(미각지당춘초몽)
연못가의 봄풀이 채 꿈도 깨기 전에

階前梧葉已秋聲(계전오엽이추성)
계단 앞 오동나무 잎은 이미 가을소리로구나

 

주자가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한 '偶成(우성)'이라는 시인데 '우연히 지어진 시' 치고는 정말 절창이다.

 

이 시는 도연명의 ‘성년부중래 일일난재신(盛年不重來 一日難再晨, 젊은 나이는 일생에 두 번 오지 않으며, 하루 동안에 아침은 두 번 오지 않는다)’과 함께 면학을 권장하는 유명한 시다.

 

송나라의 대유학자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에 대해 살펴보자.

 

▲ 주자(바이두)     © 데일리차이나



 

조숙한 천재

 

“학문하는 사람들에게 진보가 없는 것은 단지 ‘마음이 여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밤에 종 치는 소리를 들었다. 메아리가 아직 귓가에 맴돌고 있는데 이 마음은 어딘가에 가버리고 거기 없었다.”

 

성리학을 통해 동아시아 사상계를 지배한 주희,
 
그는 1130년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현에서 태어났는데, 다섯 살부터 본격적으로 문장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지적으로 매우 조숙했다.

 

“나는 5, 6세부터 생각에 잠겨 괴로워했다. 대체 천지사방의 바깥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사방은 끝이 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꼭 끝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이후 그는 불교와 도교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된다.

 

그의 사상은 '육상산(陸象山)'과의 논쟁을 통해 더욱 발전·심화되는데··

 

'性卽理' vs '心卽理'

 

그는 ‘천리에서 부여 받은 본성이 곧 이치’라 주장했고, 육상산은 ‘마음이 곧 이치’라 주장했는데 이는 이후 '성리학'과 '양명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평생을 관직보다 학문에 전념

 

"단 음식을 먹고 나면 반드시 신맛이 남고, 쓴 것은 도리어 단맛을 남긴다. 이것은 하나의 이치로, 인생이 근심과 고생에서 시작하지만 마침내 안일과 즐거움으로 되는 것과 같으니, '理'에 합당한 다음에 '和'가 온다."

그는 19세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명목상의 관직으로 평생을 학문과 교육에 전념한다.

 

半畝方塘一鑒開(반무방당일감개)
반 이랑 모난 연못에 거울 하나 열렸는데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하늘 빛, 구름 그림자 함께 배회하고 있네

問渠那得淸如許(문거나득청여허)
묻노니, 어찌하여 그처럼 맑을 수 있냐고 하니

爲有源頭活水來(위유원두활수래)
살아있는 물이 흘러나오는 근원 있어서라네

 

그가 지은 '관서유감(觀書有感, 책을 보고 느낌이 있어)'이란 시인데··

 

물의 근원이 없는 작은 연못도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원두(源頭)가 있어서 끊임없이 활수(活水)가 흘러 들어오기 때문에 맑을 수 있는 것,

 

결국 사람도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과 학문을 받아 들여야만 심성이 맑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병이 심할 때도 앞장서서 늘 일하려 한다.”

 

이처럼 그는 평생을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의 한길로만 나아갔다.

 

사서(四書) 중심의 유학 체계 확립

 

▲ 사서_바이두     © 데일리차이나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역경), 예기(禮記), 춘추(春秋)의 오경(五經)과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의 사서(四書),

 

한당(漢唐) 시대 유학을 오경 중심의 유학, 송대(宋代) 이후 유학을 사서 중심의 유학이라 하는 데, 이는 결국 그의 업적에 따른 것이다.

 

그는 먼저 '예기'에서 '중용'과 '대학'을 독립시킨 후 이들을 '사자(四子)'라는 이름으로 한데 모아 새롭게 간행한다. (四書集注)

 

특히 그는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까지도 '대학'의 주석을 다듬는데 몰두했는데 그 중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사물이 궁구하여 이른 이후에 앎이 극진해지고, 앎이 극진해진 이후에 뜻이 실다워지고, 뜻이 실다워진 이후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이후에 몸이 닦이고, 몸이 닦인 이후에 가정이 가지런해지고, 가정이 가지런해진 이후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이후에 천하가 평정되느니라."

 

결국 그는 자연적인 올바른 이치(理)와 그것이 인간 본성으로 내면화된 성(性)을 중심으로 기존의 유학을 재해석했는데 이를 통상 '성리학'이라 한다.

 

성리학의 집대성

 

중국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유학은 초기에는 종교나 철학 등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순한 '도덕사상'에 불과하다.

 

이후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큰 시련을 겪은 유학은 한·당대에는 경전을 수집·정리하고, 그 자구에 대한 주해를 주로 다는 소위 '훈고학'이 발전한다.

 

그러나 송·명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노불(老佛) 사상을 가미하면서 이론적으로 심화되고 철학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는데 바로 '성리학'의 성립이다.

 

그는 '북송오자(北宋五子)'라 일컬어지는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소옹 등의 학설을 집대성하여 새로운 유학의 체계를 확립하는데, 그 내용은 크게 태극설(太極說), 이기설(理氣說), 심성론(心性論)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그가 편찬한 책이 80여 종, 남아 있는 편지 글은 2천여 편, 그의 제자가 467명에 달하니 가히 그는 동아시아 사상사의 비조(鼻祖)라 할 수 있다.

 

그의 성리학은 오랫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를 지배했고, 특히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주자가 이미 완벽하게 밝혀 놓았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다만 그의 이치를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자의 말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주장을 하거나 주자와 다른 경전의 주석을 다는 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일 뿐이다.”

 

실록에 3천 번이나 등장할 정도로 조선 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붓'으로 지배했던 송시열의 주장이다.

 

마치며

 

昨夜江邊春水生(작야강변춘수생)
지난밤 강가에 봄물이 불어나니

蒙衝巨艦一毛輕(몽충거함일모경)
거대한 배가 터럭처럼 떠올랐네

向來枉費推移力(향래왕비추이력)
이전엔 힘을 들여 옮기려고 애썼는데

今日中流自在行(금일중류자재행)
오늘은 강 가운데 저절로 떠다니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돼, 비가 오면 저절로 뜨는 배처럼 하늘이 주신 때를 겸허히 기다릴 줄 알았던 주희,

 

그는 66세 때 한유의 전집을 교정한 '한문고이(韓文考異)'를, 69세 때 '초사집주(楚辭集註)'를, 70세 때 '후어(後語)'와 '변증(辨證)'을 완성하였으니 정말 죽는 순간까지 학문을 향한 그의 열정은 잦아들 줄 몰랐다.

 

1200년 그는 마침내 71세를 일기로 눈을 감는데, 임종 직전 다음의 유언을 남긴다.

 

“괜히 여러분을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오게 했구나. 하지만 도리(道理)라는 게 본래 그런 것이기는 하지. 여러분 모두 힘을 모아 열심히 공부하라. 발을 땅에 굳게 붙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학문은 물을 거슬러 가는 배와 같아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 (學問 如逆水行舟 不進則退)

또한 학문은 빨리 하려 하면 이루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면 큰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欲速則不達 見小利則大事不成)

 

항상 발을 땅에 굳게 붙이고 정도(正道)를 따라 앞으로 천천히 조금씩 나아가는 사람이 되길··

 

"지금 그대가 가고 있는 그 길이 그대의 길이다. 달리 무슨 길이 있겠는가?"

 

자그만 한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도록 하자.

 

글·서정욱 변호사(전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传报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