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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열전]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武則天)

서정욱 변호사 | 기사입력 2018/03/12 [15:15]

[역사인물열전]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武則天)

서정욱 변호사 | 입력 : 2018/03/12 [15:15]

看朱成碧思紛紛(간주성벽사분분)
곱던 얼굴 어디가고 생각 어지럽네요

憔悴支離爲憶君(초췌지리위억군)
그대 생각하다 초라해진 때문이죠

不信比來長下淚(불신비래장하루)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믿지 못하시어든

開箱驗取石榴裙(개상험취석류군)
상자 열어 눈물 젖은 치마 보시어요


시선(詩仙) 이백까지 부끄럽게 만든 무측천의 당고종에 대한 연정시 ‘여의낭(如意娘)'이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로 기개와 권모로 천하의 대세를 바꾼 무측천(武則天)에 대해 알아보자.

 

출생과 어린 시절

 

▲ 武则天画像_바이두     © 데일리차이나



당나라 태종의 후궁과 고종의 황후였지만 황태자들을 연이어 폐위시키고 스스로 주나라를 세워 15년 간 천하를 다스린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 무측천. 그녀만큼 호훼포폄의 대상이 된 인물도 드물다. 

 

먼저 그녀에 대해서는 한나라 여태후, 청나라 서태후와 함께 '중국의 3대 악녀'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과 음탕하고 간악하며 황위를 찬탈한 요녀라는 비난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반면 그녀에 대해 일세를 풍미한 탁월한 정치가이자 민생을 보살펴서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걸이라는 찬사도 동시에 쏟아지고 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을 수밖에 없는 것. 그 곡절 많은 삶만큼이나 여러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봐야겠다.

 

그녀는 624년 장안에서 평민 출신이지만 당의 건국 공신으로 신흥귀족인 무사확의 딸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어떠한 난관도 결코 내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을, 고독이 내 충실한 친구가 되리라는 것을, 내 삶이 죽음과 부활의 연속이리라는 것을, 고통과 절망에서 더 없는 기쁨이 탄생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에 대한 소설(샨사, 측천무후)의 한 구절처럼 그녀는 어떠한 난관도 결코 굴하지 않는 강인한 아이였고, 고통과 절망에서 오히려 더 없는 기쁨을 찾아내는 특이한 아이였다.

 

당태종의 후궁

 

한고조 유방의 호탕함과 뛰어난 용인술, 거기에 위무제 조조의 지모와 용병술을 갖춰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추앙 받는 당태종 이세민. 그녀는 14살 때 정5품 '재인(才人)'이 되어 그의 후궁으로 입궐한다.

 

당시 황제는 황후를 제외하고도 4비(妃), 9빈(嬪), 27세부(世婦), 81어처(御妻)를 둘 수 있어 후궁만 121명이었고 따라서 품계를 받았지만 비빈(妃嬪) 급이 아닌 이상 일반 궁녀와 다를 바 없었다.

 

갓 황궁에 들어온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돌하고 무서운 성격을 보여주는데 이에 대한 일화를 한 토막 소개한다.

 

하루는 태종이 그녀에게 사나운 말을 제압하라 한다.

 

이때 그녀는 "쇠로 된 채찍과 철퇴, 칼을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태종이 이유를 묻자 이때 그녀가 말하길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철퇴로 머리를 찍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칼로 목을 따겠습니다."

 

이와 같이 당돌하고 거친 성정 탓에 그녀는 반짝 태종의 눈에 들었다가 곧 총애를 잃고 궁녀들이 기거하는 좁은 방으로 내쳐진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기는커녕 환관들의 환심을 사서 궁내 정보를 모으는 한편 궁중 학교인 내문학관에서 학문과 교양을 익히고 황제의 수행시녀가 되어 차를 끓이면서 제국의 통치술을 어깨 너머로 배운다.

 

이후 태종이 붕어하자 그녀를 포함하여 아이를 갖지 못한 비빈들은 절에 보내져 죽은 황제를 위한 공양을 드리며 남은 생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는데··

 

당고종의 황후

 

부왕 태종의 뒤를 이어 팽창주의적 대외정책을 추진하여 당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고구려, 백제, 신라, 토번, 돌궐, 왜)와 전쟁을 한 당고종 이치.

 

어느 날 그는 태종의 기일에 감업사로 갔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정열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첫눈에 반했다기보다는 이전부터 관심이 있었다고 봐야겠다.

 

모자지간인 그들의 사랑은 '오이디푸스'의 운명적 사랑처럼 위태로운 것이었다.

 

그녀가 다시 황궁에 발 들여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종의 황후가 소 숙비를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인데 결국 둘 다 그녀의 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친다.

 

“무씨는 왕씨와 소씨에게 곤장 100대씩 때렸다. 손발을 잘라 술독에 넣고는 두 계집의 뼈까지 취(醉)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명령했다. 두 사람이 죽자 시신을 참하도록 했다.”

 

자치통감의 기록인데 여담이지만 소 숙비는 죽으면서 "무후는 쥐가 돼라. 나는 고양이가 되어 그 쥐를 잡아먹으리라"고 저주하였고 그 후 그녀는 궁중에서 고양이 키우는 것을 엄금했다고 한다.

 

한편 그녀는 황제가 되기 위해 친아들을 두 명이나 죽인 외에도 황후를 모해하기 위해 친딸까지 죽였는데··

 

욕심으로 얻는 것과 열망으로 성취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인 것, (To desire is to obtain; to aspire is to achieve, 제임스 앨런)

 

단순한 권력욕(desire for power)과 권력에 대한 의지(will to power)는 구별해야 하는 것.

 

그녀의 행동이 '단순한 권력욕에 의한 욕심'인지, 아니면 '권력에 대한 의지에 의한 성취'인지 부족한 저로서는 판단이 어렵다.

 

다만 감정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야망은 권력에 대한 무한 욕심(Ambition is the immoderate desire for power)”이라고 정의했는데 그녀가 그 누구보다 야망이 크고 강했다는 사실은 분명하겠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황후에 이어 다시 '천후(天后)'에까지 봉해져 고종과 나란히 앉아 함께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여 '이성(二聖)'으로 불린 무측천, 그녀는 5천년 중국 역사상 '명실상부'하고 '유일무이'한 여황제다.

 

683년 고종이 죽자 그녀는 셋째 아들 이현(李顯)을 황제(중종)로 옹립하였는데, 처인 위후와 그 부친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한다고 하여 폐위시키고 막내아들 이단(李旦)을 황제(예종)로 즉위시켰다.

 

이후 690년 그녀는 예종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주(周)'로 개명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는데 역사는 이를 '무주(武周)'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그녀는 공포정치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녀의 통치기간은 평화로운 치세였다.

 

그녀는 문벌을 타파하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했고 적인걸, 장간지, 요숭 등 명재상들이 그녀의 치세에 연이어 나왔다.

 

또 호구와 토지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귀족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했고, 따라서 황족이나 문벌귀족에게는 공포의 대명사였지만 백성 입장에서는 구세주였다.

 

경제적으로도 그녀의 치세 동안 당나라의 경제는 괄목상대하여 국고가 가득 찼고, 652년 380만 가구였던 인구가 만년에는 615만 가구(3700만명)로 급증했다.

 

결국 그녀는 태종의 '정관의 치' 이후 가장 성공한 정치를 펼쳐, 훗날 현종의 '개원의 치'의 발판을 마련했다.

 

마치며

 

탁월한 지혜, 비범한 담력, 불굴의 의지, 명철한 수단으로 시대의 한계에 저항했던 철의 여인 무측천.

 

남성 일변도의 세상에서 극단적 성 차별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당 제국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했던 그녀도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었다.

 

705년 82세의 그녀는 노환으로 몸져눕게 된다.

 

이 소식을 듣고 80세의 연로한 재상 장간지는 군사를 이끌고 장생전으로 가 그녀에게 퇴위를 요구한다.

 

늙은 그녀로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고 결국 15년만에 당의 국호가 부활하고 중종이 복위된다.

 

“여치(여태후)와 무조(무측천)는 유약한 임금을 만나 천자행세를 했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 어찌 늙은 할멈이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삼국사기)

 

유교국가의 제왕학에서는 여성 황제가 결코 용납되지 않는 것,

 

이후 그녀는 엄연한 황제였음에도 남성 중심의 사가들에 의해 황제의 칭호가 금지당하고 '무후(武后)'로 깎여 불린다.

 

이제야말로 남성들의 전유물 ‘히스토리(history)’가 아닌 그녀의 입장에서 바라본 ‘허스토리(herstory)’도 필요하지 않을지··

 

"나의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

 

그녀의 유언에 따라 유일한 두 황제의 합장묘인 시안 건릉(乾陵)에는 '무자비(無字碑)'가 서 있는데··

 

이에 대해 수많은 해석이 있지만 고민 끝에 필자가 내린 결론은 '모든 것을 역사의 평가에 맡기려는 겸손의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리고 그녀의 비석에 다음의 글을 새기고 싶다.

 

너른 이마에 네모진 턱, 튼튼한 골격, 강인한 이미지, 이지적 분위기의 여걸 무측천이여!!!

 

권력욕에 사로잡힌 악녀였는가? 번영의 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황제였는가?

 

그대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엇갈리고 있다.

 

흔히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이고,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라고 하지만 그대는 세상도 남자도 모두 지배했다.

 

각종 폐단을 개혁하고, 인재를 등용하고, 백성을 위해 농업을 발전시키고, 국토를 지켜낸 그대의 치세,

 

"그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걸출한 여정치가였다"

 

쑨원의 부인 쑹칭링의 평가로 필자의 평가를 대신한다.


글·서정욱 변호사(전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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