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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열전] 불세출의 책사, 장량(張良)

서정욱 변호사 | 기사입력 2018/02/14 [16:19]

[역사인물열전] 불세출의 책사, 장량(張良)

서정욱 변호사 | 입력 : 2018/02/14 [16:19]

장공(長空)에 걸린 달아, 만고 인물 네 알리라
영웅은 그 누구며, 호걸은 누구누구
아마도 제일 인물은 장자방인가 하노라

 

조선 후기 문신 이정보가 지은 시조에 나오는 불세출의 책사, 전략가의 대명사 장량(張良)에 대해 알아보자.

 

▲ 来源:百战网_baidu image     © 데일리차이나



 

진시황 암살 시도 (BC 219년경)

 

초년에는 ‘지사’의, 중년에는 ‘책사’의, 말년에는 ‘은사’의 삶을 산 불세출의 전략가 장량.

 

그의 집안은 한(韓)나라의 유력한 귀족 가문으로 그는 건달들이 대부분인 유방 진영에서 유일하게 '자방(子房)'이라는 자를 갖고 있을 정도로 보기 드문 명문가의 후손이다.

 

망국의 한을 삭히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진시황의 순행경로인 박랑사(博浪沙) 숲에 매복한다. 그의 옆에는 120근(30kg)이 넘는 무거운 철추를 마음대로 던질 수 있는 역사(力士)가 같이 숨어 있었다.

 

마침내 진시황 일행이 나타났는데 똑 같이 생긴 마차가 3대였다. 어느 것이 진짜 진시황이 탄 마차일까 고민하다 중간의 마차를 겨냥하여 철추를 던졌는데 명중하여 마차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러나 인명재천(人命在天), 마지막 마차에서 나온 진시황은 범인을 잡으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결국 그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 하비(下邳)에 은거한다.

 

장구한 중국 역사 속에서 후세에 무수히 많은 '최초'를 남겨놓은 '영원한 시황제' 진시황, 결국 아직 그의 운명이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황석공(黃石公)으로부터 병법 전수

 

'유자가교(孺子可敎)', '젊은이는 가르칠 만하다'는 뜻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를 칭찬할 때 쓰는 말인데 이 말은 그와 황석공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하비의 흙다리 난간에서 실패를 자책하며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어느 날 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노인은 다짜고짜 신발을 벗어 물에 빠뜨리더니 그에게 주워오라 시킨다.

 

그는 내심 화가 났으나 억지로 참고 다리 아래로 내려가 신발을 주워온다.

 

이때 노인이 말하길,

 

“신발을 신겨라.”

 

그는 기왕에 신을 주워왔으므로 꾹 참고 꿇어앉아 신발을 신겨준다.

 

노인이 이런 괴이한 행동을 하는 것은 뭔가 범상치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노인은 근처 느티나무를 가리키며 닷새 후 새벽 저 밑에서 만나자며 사라진다.

 

닷새 뒤 그는 느티나무로 갔으나 노인이 먼저 나와 그가 늦게 왔다며 화를 내고 닷새 뒤 다시 오라 한다.

 

닷새 뒤 그는 더 일찍 갔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느티나무 아래서 밤을 새우는데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나타나더니 두루마리 한 권을 건네준다.

 

바로 태공망(太公望)이 저술한 병법서(兵法書)였다.

 

그리고 노인은 "13년 뒤에 산기슭에서 네가 마주치게 될 노란 돌이 바로 나다"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훗날 그는 이 예언대로 자신이 산에서 발견한 노란 돌을 가지고 돌아와 이를 가보로 전했으며, 사후 그의 무덤에도 함께 부장된다.

 

유방과의 만남

 

"군막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에서 벌어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 장자방이다. (유방)"

 

그는 소하(蕭何), 한신(韓信)과 함께 한나라 건국의 3걸로 불린다(西漢三杰).

 

세력이 미미한 유방이 천하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앞을 내다보는 뛰어난 안목과 전략 때문이었다.

 

그는 한신처럼 직접 전투에 참가하거나, 소하처럼 병참보급으로 눈에 보이는 큰 공을 세운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전략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방을 도왔다.

 

유방이 서촉으로 들어가며 잔도를 불태워 중원으로 돌아올 뜻이 없다는 제스처를 보인 일이나, 그곳에서 거병하며 항우가 초회왕을 살해하고 옛 왕국들의 후예를 푸대접한 점을 명분으로 세운 일, 전쟁이 끝나고 새 제국의 수도를 관중(장안)으로 정한 일 등은 모두 그의 전략이다.

 

또한 홍문의 연회(鴻門之宴)나 형양성 포위전 때 유방을 구사일생으로 도망치게 한 것도 그의 꾀였다.

 

“이름이 알려진 일도 없고, 용맹한 공적도 없었다. 다만 어려운 일을 쉬운 가운데 도모하고 큰 일을 작은 일 속에서 처리했다. (사기)”

 

사마천은 그를 다룬 '유후세가'를 소하의 '소상국세가', 조참의 '조상국세가' 뒤에 놓았지만 그 공은 결코 이들에 비해 적지 않다고 봐야겠다.

 

공성신퇴(功成身退)

 

奇謀不遂浪沙中(기모불수낭사중)
기이한 꾀로도 박랑사에서 뜻 못 이루고

杖劒歸來相沛公(장검귀래상패공)
긴 칼 짚고 돌아와 패공 유방을 도왔네

借箸便能成漢業(차저편능성한업)
임금 밥상의 젓가락을 빌려 한나라 대업을 이루었고

分符獨自讓齊封(분부독자양제봉)
논공행상시 제의 제후 되기를 사양했네

平生智略傳黃石(평생지략전황석)
평생의 좋은 지략 황석공에게서 전해 받고

老去功名付赤松(노거공명부적송)
늙어서는 공명을 마다하고 적송자 신선을 따랐네

堪笑世人長役役(감소세인장역역)
세상 사람들 오래 경박 간사함이 우습나니

功成勇退是英雄(공성용퇴시영웅)
공을 이루고는 용퇴함이 곧 영웅이네

 

조선 중종 때 문신 채수가 지은 시인데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정사와 야사의 기록이 엇갈린다.

 

초한지와 각종 전설은 그가 공신들이 토사구팽을 당하는 현실을 보고 적송자라는 신선을 따라 산림에 은거하다 스스로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기'에 따르면 그는 후계자 문제를 놓고 여후에게 조언을 해 주는 등 계속 중앙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고 혜제가 죽고 본격적으로 여씨 천하가 될 때, 그의 아들인 장벽강이 대신들에게 꾀를 줌으로써 한바탕 피바람을 막았다는 대목도 있다.

 

그가 세상을 버리고 은둔했는지 아니면 공신 제후의 한 사람으로 편안히 여생을 마쳤는지 정확한 팩트를 알 순 없지만 한고조가 유력한 공신들을 다 없애는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공적이 뛰어난 그가 무사했다는 것은 그의 뛰어난 처세술로 봐야겠다.

 

말년에 그는 팔각정 모양의 전통양식의 별장을 지은 후 '방원각(方圓閣)'이라 이름 지었는데, 어느 날 그는 두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 '방원(方圓)'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모나고도 둥근 것 그것이 방원(方圓)이다. 네모진 것을 열 개 스무 개 자꾸만 쌓아 올려 보아라. 그러면 나중엔 모난 것들이 둥그래진다. 정방형(正方形)이 누적되면 원(圓)을 이룬다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 모질 때는 모질어야 되겠지만, 그것은 반드시 원만함을 전제로 해야 하느니라."

 

결국 살구꽃은 삼월에 피고, 국화는 구월에 피듯이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것.

 

'지각진퇴(知覺進退)'의 지혜야말로 그의 가장 위대한 점으로 봐야겠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그와 같이 '지각진퇴(知覺進退)'의 지혜를 분명히 인식하고,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뛰어난 책사가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글·서정욱 변호사(전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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