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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깊은 漢字] 백안시(白眼視)와 청안시(靑眼視)

심의용 작가 | 기사입력 2017/09/06 [10:11]

[속깊은 漢字] 백안시(白眼視)와 청안시(靑眼視)

심의용 작가 | 입력 : 2017/09/06 [10:11]

 

세상에서 가장 알고 싶지만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사람의 속마음이 아닐까? 저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꿍꿍이가 숨어 있을까를 의심하기 시작할 때 삶은 지옥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대 중국의 맹자에 따른다면 사람의 마음을 알려면 눈동자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 맹자는 그것을 ‘모자(眸子)’라고 불렸다. 눈동자다. 동공(瞳孔)이라도 한다.


그러나 진회생물학에 따른다면 맹자의 생각은 한편으로는 옳았지만 한편으로는 틀렸다. 옳았던 이유는 속마음을 읽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을 눈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틀린 점은 핵심은 눈동자가 아니었다. 눈은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동공, 홍채 그리고 공막. 맹자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 동공과 홍채 부분을 중시했지만 진화생물학에서는 공막을 중시한다. 공막은 흰 자위부분이다.


이 공막이 중요한 이유는 호모 사피엔스와 계통적으로 가까운 침팬지, 보노보, 오랑우탄 등 원숭이 종에는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막은 오직 인간만이 발달했다. 공막은 이성만큼이나 인간 고유의 특성이다. 공막은 사회성과 관련이 깊다고 한다. 그냥 사회성이 아니라 울트라소셜리티(ultrasociality)이다. 초사회성이다.

 
<울트라소셜>이란 책을 보면 흰 공막은 진화생물학적 의미가 있다. 호모 사피엔스의 상호 협력을 촉진했다. 그것이 바로 ‘협력적 눈 가설’이라고 한다. 흰 공막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눈동자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이 눈동자의 움직임을 보고 서로를 탐색할 수 있고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협력하기도 하고 상대의 의도를 간파하기도 한다. 흰 공막은 선명한 시선을 만들어 의도와 행동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사회적 장치로서 기능한다. 공막은 초사회성의 진화적 흔적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진화와는 다르게 이 공막을 사회정치적 맥락 속에서 의식적으로 사용한 인물이 있다. 백안시(白眼視)라는 말이 있다. 백안시는 사전적인 의미로서 사람의 비중을 가볍게 보아 업신여기거나 냉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백안시라는 말도 족보가 있다. 백안시의 원조는 위진 시대 죽림칠현으로 유명한 완적(阮籍)이다.


완적은 세속의 예의범절에 얽매인 위선적인 사람들을 보면 동공을 뒤집어 공막만을 드러내 흘겨보았다고 한다. 백안시다. 완적은 백안시를 의식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생물학적으로 진화한 공막을 위선적인 인간을 보기 싫다는 혐오를 공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서로 협력하려고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기 위해 진화한 공막을 자신의 혐오를 드러내는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완적은 한층더 진화한 초초사회성을 실천한 인물이라 평가함직하다.


그러나 공막을 혐오를 드러내는 수단만으로 사용하다가 오히려 정치적 박해를 당하기 쉽다. 진화의 목적이 적응(adaptation)이라면 진화생물학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기 십상이다. 적응에 적합한 것이 백안시가 아니라면 무엇이 적합할까? 청안시(靑眼視)다. 완적은 청안시도 백안시만큼 실천했던 인물이다. 

 

글·심의용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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