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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깊은 漢字] 겸손(謙遜)

심의용 작가 | 기사입력 2017/10/10 [16:22]

[속깊은 漢字] 겸손(謙遜)

심의용 작가 | 입력 : 2017/10/10 [16:22]

 

벼는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성숙한 사람은 뻣뻣하게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숙인다는 말이다. 겸손은 성숙의 징표이다. 이러한 현상을 의심한 사람이 있다. 인간의 심리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라로슈프코이다.


“행복감에 도취된 사람은 남에게 시기 받고 경멸받기 십상이다. 이런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바로 겸양이다. 따라서 겸양은 정신력의 헛된 과시라 할 수 있다. 또한 지극히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겸양은 실제보다 더 위대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의 표출이다.”


그럴듯하지 않는가? 가진 자의 여유라는 것이 있다. 가진 자들은 먼저 자신의 것을 안전하고 여유롭게 챙긴 뒤에 그래도 남은 것을 타인에게 선심 쓰듯 겸양을 부리며 엄살을 떤다. 그 이유는 라로슈프코에 따른다면 선심 쓰는 겸양을 부려서 자신의 행복이 타인들로부터 시기와 질투와 원망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부유한 사람들이 보이는 겸양은 자기 재산을 보호하는 방어술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더 위대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공격술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들의 방어술에 담긴 기만을 간파했을 때 역겨워하고 공격술에 감추어진 오만을 느꼈을 때 분노한다. 


때문에 공자의 이런 말은 곰곰이 생각해 볼만하다. 그의 제자 자공이 물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다면 어떠합니까?”(貧而無諂, 富而無驕) 자공은 경제적 실리에 밝은 부유한 장사꾼이었으며 높은 관리였다.


이러한 질문에 담긴 자공의 의도는 뻔하다. 자기 자랑인 것이다. 자신은 부자이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니 군자가 아니겠는가라는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조롱도 숨겨 있다. 가난한 사람은 극단적인 궁핍에 처하면 아첨하기 쉽다는 말이다. 공자가 자공의 속내를 간파하지 못했을까? 아니다. 분명 공자는 자공의 질문에 담긴 무의식을 읽었다. 


“가난하면서도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未若貧而樂, 富而好禮)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는 태도에는 아첨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이 결연한 의지 속에는 부유한 자들에  대한 분노와 역겨움이 감춰있다. 분노와 역겨움 때문에 아첨하지 않으려는 노력에는 또한 교만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교만이 감추어진 겸손은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어찌 즐거울 수 있겠는가?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교만하지 않으려는 자기 극복의 겸손에는 오만이 전제되어 있다. 오만을 전제한 겸손은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는 방어술이 아니면 자신을 드러내려는 공격술에 불과하다. 역겨움과 분노의 치욕을 당할 수도 있다.


공자는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파악했다. “공손함이 예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恭近於禮, 遠恥辱)” 이 말은 거꾸로 이해할 수 있다. 공손과 겸손이 예에 어긋났을 경우에 치욕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공손이건 겸손이건 항시 예에 합당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에 어긋날 경우 위선일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는 깍듯한 예의를 지키라는 도덕적 형식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합당함을 생각해야 한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가 그 부를 가능하게 한 사회 속에서 어떤 합당함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은 합당한 방식으로 자신의 부를 사용해야한다. 불법과 편법으로 자신의 부를 끝끝내 유지하면서 깍듯한 예의를 갖추는 듯한 겸손과 시혜를 베푸는 듯한 자선을 행하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 


그러므로 가난하면서도 즐거운 이유가 무엇이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럴 때 공자가 말하듯이 가난한 자들의 겸손이 어떻게 즐거울 수 있고 부유한 자들의 겸손이 어떻게 예에 가까울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글·심의용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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