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이징뉴스

[속깊은 漢字] 절실(切實), 간절(懇切) 그리고 친절(親切)

심의용 작가 | 기사입력 2017/09/10 [16:02]

[속깊은 漢字] 절실(切實), 간절(懇切) 그리고 친절(親切)

심의용 작가 | 입력 : 2017/09/10 [16:02]

 

“사자가 먹이를 갈구하듯이 너희들은 그렇게 앎을 갈구하는가?” 니체의 물음이다.

 

사자의 갈구는 자기 과시나 자기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자의 갈구는 배고픔이라는 절실함과 간절함에서부터 나온다.

 

우리는 앎을 사자처럼 알고 싶은가? 그 앎은 자신의 절실(切實)함과 간절(懇切)함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그럴 때 자기 과시나 이해관계와는 무관한 기쁨이 된다. 그러나 과시나 이해관계와는 무관한 기쁨이라고 해서 홀로만의 자기도취적 즐거움은 아니다. 절실함과 간절함이 친절(親切)함으로 전환되는 역설은 가능하다.

 

사전적으로 친절함이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친근하고 다정하다는 뜻이다. 친절함이란 타인을 대하는 태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단지 타인의 시선만을 의식할 때에는 위선이 되기도 한다. 친절한 태도에 감추어진 위선을 느낄 때 가증스럽다.

 

절실(切實)과 간절(懇切)과 친절(親切)이라는 한자를 주목해보자. 거기에는 모두 절(切)이라는 글자가 있다. 친절의 의미를 어떤 사람은 일본의 할복 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할복할 때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단번에 목을 베어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목을 직접 잘라 준다는 의미로서 친(親)히 목을 잘라준다(切)는 의미라는 것이다. 절(切)을 끊는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의 경우는 확실하다, 실제에 가깝다, 진실하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런 맥락이라면 친절은 친(親)히 절(切)실하게 체험해보았다는 의미이다. 몸소 절실하게 체험해 보았기 때문에 확실하고 실제에 가까운 것이다. 몸소 겪은 일은 절실하고 확실하기 때문이다.

 

류시화의 번역으로 유명한 나오미 쉬하브 나이(Haomi Shihab Nye)의 ‘친절함’이란 시가 있다. 그 가운데 한 구절이다. 

 

“친절함이 내면의 가장 깊은 것임을 알려면 또 다른 가장 깊은 것인 슬픔을 알아야 한다. 슬픔에 잠겨 잠에서 깨어나 봐야 한다. 너의 목소리가 모든 슬픔의 실들을 알아차려 그 천의 크기를 알 때까지 슬픔과 이야기해 봐야 한다.”

 

친절함은 단지 타인에 대한 친근한 예의의 차원만은 아닌 이유는 어떤 슬픔의 애절(哀切)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애절함을 느꼈기 때문에 절실함과 간절함이 되고, 그 간절함은 자신에 대한 친절과 타인에 대한 친절함이 된다. 

 

결국 타인에 대한 친절함은 자신의 애절함으로부터 나온 타인에 대한 공감이고, 그 공감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부득이한 간절함이다. 하여 그 간절함 때문에 타인에게 친근하고 다정하게 대할 수밖에 없어서 몸소 행하려고 하는 절박(切迫)함이기도 하다.

 

애절함에서 절실함로, 절실함에서 간절함로, 간절함에서 친절함로 이어지는 이 절절한 절(切)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난 자꾸 까칠해지고 있다. 절실한 내실보다는 과시적인 형식들만 따지면서 박절(迫切)하고 야박한 꼰대가 되어간다. 혹시나 인스턴트 음식으로 꾸역꾸역 배를 채우기 때문에 사자가 먹이를 갈구하는 그 진실에 대한 배고픔을 잊었기 때문은 아닐까? 

 

글·심의용 작가

 

 
传报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