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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열전]韓 최초 세계인, 순례자 혜초

서정욱 변호사 | 기사입력 2017/10/02 [15:47]

[역사인물열전]韓 최초 세계인, 순례자 혜초

서정욱 변호사 | 입력 : 2017/10/02 [15:47]

月夜瞻鄕路(월야첨향로)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浮雲颯颯歸(부운표표귀)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喊書參去便(함서참거편)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風急不廳廻(풍급불청회)   
바람이 거세어 화답(和答)이 안 들리는구나

 

我國天崖北(아국천애북)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他邦地角西(타방지각서)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日南無有雁(일남무유안)   
무더운 남방엔 기러기마저 없으니

 

誰爲向林飛(수위향림비)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 경주)으로 날아가리

 

남천축국에서 혜초가 달 밝은 밤 먼 북쪽 고향하늘을 바라보며 어느 누구에게도 전할 길 없는 이국에서의 외롭고 쓸쓸한 심회를 읊은 시이다.
 
험난한 천축으로의 구법 여행을 통해 '왕오천축국전'이라는 불후의 문명탐험기를 남긴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인, 혜초에 대해 살펴보자.

 



순례자 혜초, 당나라로 떠나다


불교의 본고장, 인도까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구도(求道)의 길을 걸은 순례자 혜초. 두려운 마음을 때로 기도하며, 때로 노래하며, 사막과 얼음 구덩이로 ‘귀축제사(歸竺諸師, 가고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길)'의 길을 걸은 혜초.

 

그는 704년 신라 성덕왕 18년에 태어났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집안과 고향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현재는 그가 5만리의 대장정을 시작한 신실크로드의 시발점인 평택항에 그의 기념비가 있다)

 

그는 16살이 되던 719년에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는데 그가 언제 어떤 연유로 중국에 가게 되었는지도 전혀 기록에 없지만 추측컨데 당시 승려들에게 당나라 유학은 신라에서 구해보기 힘든 불경을 얻고 또한 최고 수준의 불경 연구와 최신의 정보를 얻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당나라로 간 그는 광저우에서 인도 출신의 밀교(密敎) 승려인 금강지(金剛智)를 만나 스승으로 섬기게 되는데, 밀교는 대승불교 사상을 중심축으로 하여 힌두교의 사상을 결합한 종교로서, 금강지가 바로 창시자다.


떠날 때는 100명이나 돌아온 자는 한 명도 없는 '천축국' 여행


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 붙었고
찬바람은 땅을 가르도록 매섭다
넓은 바다 얼어서 단을 이루고
강은 낭떠러지를 깎아만 간다
용문(龍門)엔 폭포조차 끊기고 말았으며
정구(井口)엔 뱀이 서린 듯 얼음이 얼었다
불을 들고 땅끝에 올라 노래 부르리
어떻게 저 파미르 고원 넘어가리오

 

그가 겨울날 투가라국에 있을 때 눈을 만나 그 느낌을 읊은 이 시에서 보듯이 당시 천축국 여행은 ‘떠날 때는 100명이나 돌아온 자는 한 명도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험난한 여정이었다.

 

당시 당나라 승려 중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인 현장(玄奘)처럼 인도를 다녀와 고승의 반열에 오른 이가 적지 않았는데, 스승의 권유와 더불어 이 또한 그가 낯설고 먼 인도 여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고 봐야할 듯.

 

723년 바닷길을 통해 동천축국에 닿은 그는 부처님이 태어난 가비야라국(룸비니 동산)이 있는 중천축국을 거쳐 남천축국,  서천축국, 북천축국을 두루 주유한다.

 

"한 달 걸려 쿠시나가라에 당도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곳이다. 성은 이미 황폐해져서 사람 사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자리에 탑을 세워 두었는데, 스님 한 분이 그곳을 청소하면서 물을 뿌리고 있다. 해마다 팔월 초파일이 되면 비구와 비구니, 그리고 도를 닦는 사람들과 속세의 사람들이 탑 있는 곳에 모여 크게 공양을 베푸는 행사를 치른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쿠시나가라를 거쳐, 마침내 도를 이룬 보드가야의 마하보리사에 당도했을 때, 그는 그 벅찬 감격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 않는데
어찌 녹야원(鹿野園)이 멀다 하리오.
다만 멀고 험한 길 근심될 뿐
업보(業報)의 바람 휘몰아침도 두렵지 않네.
팔탑(八塔)은 참으로 보기 어려우니
어지러이 오랜 세월에 다 사라져 버렸네.
어찌하면 한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질까?
오늘 아침 두 눈으로 똑똑히 보누나.

 

그 후 그는 천축국 뿐만 아니라 서역 대식국(大食國)의 페르시아를 거쳐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둘러 본 후,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을 넘어 다시 당나라로 돌아왔는데, 결국 그는 4년 동안 지구의 약 3분의 1을 돌아보게 된 셈이다. (오늘날 기준 약 40여 개 나라)

 

 

우리나라 기행문학의 효시이자, 노정기와 서정시의 만남,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프랑스 출신의 유명한 동양학자 펠리오는 1908년 중국 간쑤성에 위치한 둔황 천불동 석굴에서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 하나를 발견한다.

 

비단길의 시발지이자, 낙타에 짐을 가득 싣고 험난한 천산산맥을 넘어온 상인들에게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는 비단길의 마지막 기착지로서, 동서양의 민족과 종교가 교차하며 직조되는 둔황.

 

당시 이 두루마리 필사본은 책의 이름은 물론 저자의 이름조차 떨어져나간 상태였지만 이 책이 지닌 문화사적 가치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이 90여 년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책의 이름은 '왕오천축국전'이고, 저자는 신라의 고승인 혜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오도릭의 '동유기', 이븐 바투타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와 더불어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로 꼽힐 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여행기로서 높은 문명사적 가치를 지닌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 왕오천축국전,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와 문명을 보고 듣고 느끼고 받아들인 한 인문학자의 자기 고백서로, 종교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인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지리, 풍속과 문화에 대한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다.


프랑스 한 도서관에 유폐돼 있는 왕오천축국전, 반드시 돌려받아야

 

▲ 출처: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 데일리차이나


약관에 혈혈단신으로 이역땅을 누비며 출중한 기량과 글재주, 의지와 용맹,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정신을 아낌없이 보여준 혜초.

 

그는 천축국에서 돌아온 후 장안의 명찰들을 전전하면서 주로 밀교 경전의 한역과 필사 및 연구에 전념하다 말년에는 산시성 오대산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들어가 787년(?) 향년 83세로 입적한다.

 

그는 신라라는 국적을 뛰어넘고, 당나라 중심의 세계관과 문명관을 벗어 던진 우리 역사상 최초의 세계인이다.

 

한 나라의 위상은 그 나라가 세계성을 지닌 세계인을 얼마나 배출하였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그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의 첫 세계인으로서 장보고, 고선지와 더불어 한민족의 얼과 넋, 슬기를 만방에 유감없이 과시한 위대한 한국인이다.

 

저 멀리 무연고지인 프랑스 파리의 한 (국립)도서관에 유폐되어 있는 왕오천축국전. 강취든, 절취든, 편취든, 갈취든, 횡령이든, 점유이탈물 횡령이든, 정당한 매매든 법을 떠나 모든 문화재는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닌지.

 

최초 굴을 발견한 중국인 왕도사가 펠리오에게 얼마를 받고 이 책을 팔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국주의적 침략과정에서의 매매가 과연 정당성이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아무튼 경위 여하를 떠나 우리나라 사람이 쓴 우리 책을 대여받아 봐야 한다는 현실이 참으로 가슴 아프고 천 갈래 눈물 나게 한다.

 

그대 서번(토번)이 멀다 한숨짓는가
나는 탄식하네, 동쪽 길 아득하여
길은 거칠고 설령(雪嶺) 높은데
험한 골짝 물가에 도적떼 소리치네
새는 날아가다 벼랑 보고 놀라고
사람도 가다 길을 잃는 곳
한 생애 눈물 닦을 일 없더니
오늘은 천 갈래 쏟아지네.
 
‘서번 가는 사신을 만나’라는 시인데 고행의 길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한 생애 눈물 닦을 일 없던 그가 천 갈래 눈물을 쏟아내는지. 구도(求道)의 길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여정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가야만 하는 것. 구도(求道)의 길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저 광야에 외로이 걷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길 없는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

 

부족한 이 글이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켜 하루라도 빨리 반환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글·서정욱 변호사(전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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